<조선왕조실록>을 통해 본 지진

  지난 1월 20일, 강릉에서 진도 4.8의 지진이 일어나면서 한 때 지진이 인터넷 검색어 상위권을 차지하는 등 관심이 많아졌다. 한반도가 지진 안전지대인가 하는 문제는 보다 전문가들이 더 자세히 말해줄 수 있을 것이므로, 요기서는 <조선왕조실록>을 통하여 조선시대의 지진 기록을 살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다.
 
  <고순종실록>까지 포함한 실록에서(단, 경술국치 이후인 <순종실록> 부록은 제외) 찾을 수 있는 지진 관련 기록에서 지진에 대하여 논의한 기록이나 지진 때문에 사의를 표명한 정승들 얘기 빼고, 여종을 불로 ‘지진’ 잔인한 주인 이야기와 선조 때 박‘지진’이라는 인물에 대한 얘기까지 다 빼고 지진 발생기록을 살펴보면 약 1400여건이다. 조선왕조 전체 기간(대한제국 포함) 동안 연평균 2.75 건 가량의 지진이 발생하였다. 
 
 전체적으로는 조선 전기에 지진활동이 더 활발하였다. 태조와 정종 때에는 연평균 1회 미만의 지진 기록이 있었으니 태종 시대에 연평균 1.94회, 세종시대에는 연평균 4.16회의 지진기록이 발견된다. 물론 나라가 안정되면서 지진 관측 기록도 늘어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단종 때는 짧은 재위기간 중에도 21회의 지진이 기록되었음을 보면 당시 지각은 불안정했던 시기로 보인다. 이후 세조에서 성종 때까지는 연평균 2회 미만으로 다소 안정된듯 보였다가 연산군 때 다시 평균 2회를 넘어서고 중종 때는 연평균 8.72회, 명종 때는 12.91회의 지진이 기록되어 조선시대 전체를 통틀어 가장 활발한 지진 활동을 보여주고 있다. 이 시기에는 이번 지진 보다 다소 큰 규모인 듯 한 지진도 보인다.

중종 33권, 13년( 1518 무인 / 명 정덕(正德) 13년) 5월 15일 계축 3번째기사
유시에 세 차례 큰 지진이 있었다

유시(酉時)에 세 차례 크게 지진(地震)이 있었다. 그 소리가 마치 성난 우뢰 소리처럼 커서 인마(人馬)가 모두 피하고, 담장과 성첩(城堞)이 무너지고 떨어져서, 도성 안 사람들이 모두 놀라 당황하여 어쩔줄을 모르고, 밤새도록 노숙하며 제 집으로 들어가지 못하니, 고로(故老)들이 모두 옛날에는 없던 일이라 하였다. 팔도(八道)가 다 마찬가지였다.

【영인본】 15 책 433 면

【분류】 *과학-지학(地學
)

 중종-명종 시대에는 이외에도 인명피해를 부르지는 않았지만 건물이 흔들릴 정도의 지진이 여러 차례 기록되어 있다. 그러니 대신들이 지진을 이유로 사직을 청하면 왕은 이를 만류하는 일도 여러 차례 일어났고, 지진을 핑계로 당대의 권신들을 비난한 상소나 사론도 발견된다.

명종 23권, 12년( 1557 정사 / 명 가정(嘉靖) 36년) 11월 30일 기묘 1번째기사
밤에 지진이 일어나다



밤에 지진이 일어나 집들이 온통 흔들렸다.

사신은 논한다. 재변이 일어나는 것은 사람이 잘못하여 자초하는 것이다. 이 해에 들어 해일이 생겼고, 혜성이 나타났으며 관서(關西) 지방에는 큰 바람이 일어나 쇠붙이와 옹기 조각이 공중에 날았으니 이는 음(陰)이 성한 징조다. 그리고 소는 머리가 셋이 달린 송아지를 젖먹이고 닭은 네 발이 달린 병아리를 깠으니, 이는 물건의 변괴치고도 큰 것이다. 지금 천지(天地)가 활동을 중지하는 때에 수개월 사이에 경사(京師)에 두 번씩이나 지진이 일어났으니, 재이가 중첩되는 것이 어찌 이렇게도 심하단 말인가? 당시 섭리(燮理)의 책임을 맡은 훈신(勳臣)과 원로들이 자녀(子女)와 옥백(玉帛) 사이에 빠져 즐기며 지위를 얻지 못해 근심하고 잃어버릴까 걱정하면서 구차하게 날만 보내니, 조정의 시비를 누가 바룰 것이며, 현자와 간신이 뒤섞여 나아온들 뉘라서 가려내겠는가. 심지어 음흉하고 사특하기가 송(宋)의 장돈(章惇)과 채경(蔡京) 같은 무리가 이목(耳目)의 반열에 있으면서 염소처럼 고집스럽고 여우처럼 엿보아서 자기와 의견이 다른 사람에게 죄를 꾸미고 사림들에게 화란을 얽어서 일망 타진될 지경에 이르렀지만 누가 금할 수 있겠는가. 이러고 보면 음기가 성하여 번져나가는 것을 괴이하게 여길 것도 없고 재이가 일어나는 것도 의아해 할 필요가 없다. 어찌 천재 지변만이 중첩되어 마지않을 뿐이겠는가. 인사(人事)의 변고도 앞으로 이보다 더 클 것이니, 통탄할 일이다.

【영인본】 20 책 451 면

【분류】 *과학-지학(地學) / *역사-사학(史學)


  지진은 선조-광해군 때는 다소 안정되어 연평균 2회 미만 정도로 발생하였으나 인조시대부터 점진적으로 증가하여 숙종 때는 연평균 4.28회의 지진이 기록되었다. 하지만 이후로 다시 감소하여 정조 때는 재위기간 24년 단 1건의 지진만이 기록되어 있으며 철종 때는 불안한 정국과 민생 상황과는 달리 지진은 단 한건도 기록되어 있지 않아 지각이 가장 안정된 시기였음을 보여준다.
 
조선시대 대부분의 지진은 건물이 흔들리는 정도는 수차례 있으나 인명피해가 발생한 경우는 많지 않다. 물론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단종 12권, 2년( 1454 갑술 / 명 경태(景泰) 5년) 12월 28일 갑진 2번째기사
경상도 초계·선산·흥해 등지에서 지진이 일어나니 해괴제를 행하다

 경상도 초계(草溪)·선산(善山)·흥해(興海)와 전라도 전주(全州)·익산(益山)·용안(龍安)·흥덕(興德)·무장(茂長)·고창(高敞)·영광(靈光)·함평(咸平)·무안(務安)·나주(羅州)·영암(靈巖)·해남(海南)·진도(珍島)·강진(康津)·장흥(長興)·보성(寶城)·흥양(興陽)·낙안(樂安)·순천(順天)·광양(光陽)·구례(求禮)·운봉(雲峯)·남원(南原)·임실(任實)·곡성(谷城)·장수(長水)·순창(淳昌)·금구(金溝)·함열(咸悅) 및 제주(濟州)의 대정(大靜)·정의(旌義)에 지진(地震)이 일어나 담과 가옥이 무너지고 허물어졌으며, 사람이 많이 깔려 죽었으므로, 향(香)과 축문(祝文)을 내려 해괴제(解怪祭)를 행하였다.

【영인본】 6 책 715 면

【분류】 *과학-지학(地學)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인조 44권, 21년( 1643 계미 / 명 숭정(崇禎) 16년) 4월 23일 병술 1번째기사
진주에 지진이 일어나다

 

경상도 진주(晋州)에 지진이 일어나 수목이 부러져 넘어지고 합천군(陜川郡)에도 지진으로 바위가 무너져 두 사람이 압사하였으며, 오랫동안 물마른 샘에 흙탕물이 솟구쳐 나오고 관문(官門)의 앞길에 땅이 10장이나 갈라졌다.

【영인본】 35 책 154 면

【분류】 *과학-지학(地學)

 영조 89권, 33년( 1757 정축 / 청 건륭(乾隆) 22년) 6월 15일 을해 1번째기사
호서 덕산에 지진이 나서 사람이 죽다

 호서(湖西)의 덕산(德山)에 지진(地震)이 있었는데, 죽은 사람이 있었다.

【영인본】 43 책 653 면

【분류】 *과학-지학(地學)

순조 13권, 10년( 1810 경오 / 청 가경(嘉慶) 15년) 1월 27일 임오 1번째기사
함경 감사 조윤대가 함경도의 지진 참상에 대해 보고함에 잘 위유하도록 하교하다

함경 감사 조윤대(曹允大)가 아뢰기를,
“이달 16일 미시(未時)에 명천(明川)·경성(鏡城)·회령(會寧) 등지에 지진(地震)이 일어나 집이 흔들리고 성첩(城堞)이 무너졌으며, 산기슭에 사태가 나서 사람과 가축이 깔려 죽기도 하였습니다. 같은 날 부령부(富寧府)에도 지진이 일어나 무너진 집이 38호이고, 사람과 가축 역시 깔려 죽었습니다. 16일부터 29일에 이르기까지 지진이 없는 날이 없어 한 주야(晝夜) 안에 8, 9차례나 5, 6차례씩 있었는데, 이따금 땅이 꺼지고 샘이 폐색(閉塞)되는 곳도 있었다고 합니다. 부령에서 연달아 14일 동안이나 지진이 그치지 않았다고 한 것은 물론 괴이쩍지만, 또 땅이 꺼진 곳이 있다는 등의 말은 더욱 매우 의심스러웠기 때문에 다시 자세히 치보(馳報)하게 하였습니다. 그 부사(府使)가 다시 보고하기를, ‘본부(本府)의 청암사(靑巖社)가 해변에 위치해 있는데, 그 가운데서 수남(水南)·수북(水北)의 두 마을은 바다와의 거리가 더욱 가까워서 문과 담 밖이 바로 대해(大海)입니다. 그래서 유독 심하게 이런 재변을 입었는데, 모래가 덮혀 폐색된 우물이 11곳, 땅이 갈라지고 꺼진 곳이 세 곳으로, 둘레와 깊이는 각기 몇 아름이 되었습니다. 바닷가 산 위에 있는 큰 암석 하나는 굴러내리다가 둘로 갈라져 그 중 절반은 바다로 굴러 들어갔습니다. 금년 정월 12일까지 지진이 일어나지 않는 날이 없었으므로 백성들이 모두 놀라고 무서워서 눌러 살지 못하고 있는데, 지진이 반드시 여러 날 동안 그치지 않을 리가 없고 연해안이기 때문에 혹 해뢰(海雷)의 재변이 있어서 그런 듯합니다.’고 하였습니다. 대저 지난 겨울의 맹렬한 추위는 근래에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남쪽은 이미 그러하였고, 북쪽 변방은 더욱더 심해서 바다 가까운 연안에 얼음이 얼지 않은 곳이 없어서 사람과 가축이 통행하였는데, 이는 바로 3, 40년 동안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까닭에 바닷가의 습한 땅속이 얼어 있다가 쪼개지면서 땅위의 집을 흔들은 것인데, 그 기본(基本)이 흔들림으로 인해서 무너지고 깔리는 것은 이치상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겸하여 바닷물이 얼려는 차에 파도가 크게 일면서 큰 힘으로 밀려와 평지를 진동시켰으니, 이것을 해뢰(海雷)·해동(海動)이라고 해도 괴이할 것은 없다고 하겠습니다만, 지진이라고 싸잡아 말한 것은 아마 오인(誤認)한 것 같습니다. 만약 참으로 지진이었다면 무슨 까닭으로 유독 해변에만 있고, 또한 한 달 가까이 그치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 무지한 시골 백성들이 놀라고 두려워서 불안해 하고 있으니, 또한 매우 민망스럽습니다. 때문에 금방 별도로 친비(親裨)를 정해서 본읍으로 달려가 더는 요동하지 말고, 안심하고 눌러 살라는 뜻을 다방면으로 위로하고 깨우치도록 하였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해뢰와 지진은 모두 비상한 재변이므로 매우 놀랍다. 깔려 죽은 사람에게는 원래의 휼전(恤典) 이외에 각별히 돌보아 주고, 신역(身役)·환상(還上)과 잡역(雜役)을 금년 가을까지 견감해 주도록 하라. 도신으로 하여금 수령에게 분부하여 재해를 입은 백성들을 불러들여 특별히 위무(慰撫)하여 즉시 안접(安接)시켜서 일부 일부(一夫一婦)라도 이로 인해 놀라 소요되는 근심이 없도록 하라. 그리고 또한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종종 공문으로 신칙하고 때때로 염탐하여 또한 실효가 있게 하라고 분부하라.”
하였다.
【영인본】 47 책 649 면
【분류】 *과학-지학(地學) / *구휼(救恤) / *재정-역(役)



  눈여겨 볼만한 점은 지진이 많았던 중종-명종 시대에는 많은 횟수에도 사람이 죽은 기록을 찾기가 힘들고, 오히려 지각이 안정됐던 시기에 인명피해가 발생한 기록이 보인다는 것이다. 현대에는 대도시의 인구밀집과 가스나 석유, 원자력 기관 등 더 큰 인명피해를 불러올 요소도 많다는 것도 생각한다면, 우리나라의 지각이 일본 등에 비해 안정적이라 하더라도 지진 같은 재해에 주의를 기울려야 하는 이유를 과거 기록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by 을파소 | 2007/01/27 21:50 | 을파소의 역사이야기 | 트랙백 | 덧글(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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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rezen at 2007/01/27 22:33
스킨이 아까하고 또 다르게 변했네요.
Commented by 행인1 at 2007/01/27 22:52
스킨이 바뀌었군요.^^

정말 조선시대에도 지진이 많았습니다...
Commented by 이재우 at 2007/01/27 22:53
예전부터도 여기도 안전지대는 아니었군요.
Commented by zert at 2007/01/28 01:03
화산이 폭발한 적도 있었죠?

그런데 빨간색 글자가 눈에 잘 안들어오네요 ㅠㅠ
Commented by 을파소 at 2007/01/28 22:33
rezen/ 한번 바꾸고 변덕이 생겨 또 바꿨습니다. ㅡㅡ;

행인1/ 꽤 있었더군요.

이재우/ '상대적'으로 안전했을지는 몰라도, '절대적'으로 안전할 수는 없었지.

zert/ '화산'이라고 기록하지는 않아서 지진보다 찾기는 힘들지만 함경도 지방에 하늘에서 재가 내렸다 같은 기록 등을 보면 백두산의 폭발 역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글자색은 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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