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과 원균 바로보기(14)-제1차 출전 이순신/임진왜란

 

이순신이 일본군의 침공 사실을 원균에게 전해들은 것은 4월 15일이다. 원균은 멀쩡한 함대 자진해산 시켜놓고는 이제 와서 싸워보겠다고 이순신에게 구원요청을 한다. 원균옹호론자들은 이 때 이순신이 빨리 구원하러 가지 않았다고 비난하지만 조선시대 장수에게 있어서 관할지역을 벗어나는 것은 엄격히 금지된 일이다. 물론 당시에 전장상황에 따라 현장에서 지휘관이 군사행동을 할 수 있는 편의종사(便宜從事)라는 권한은 존재하였다. 하지만 그 권한의 범위가 문제이다. 자신의 관할구역에 적이 침입했다면 일단 적을 격퇴한 다음에 상부에 보고할 수 있다. 그러나 이순신의 경우는 전라좌수영 함대가 관할구역 밖인 경상도로 이동해야 하는 문제이므로 자칫하다가는 반란으로 의심받을 수도 있기에 쉽게 결정할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4월 27일 좌부승지 민준의 서장을 받으면서 이순신도 경상도 수역으로 출동하기로 마음을 굳히면서 본격적인 출전분비를 실시한다. 이를 위한 지휘관 구성은 다음과 같았다.


중위장에 방답첨사 이순신[註 순천부사 권준이었지만 관찰사 이광에 의해 육전에 투입됨]

좌부장에 낙안군수 신호

전부장에 흥양현감 배흥립

중부장에 광양현감 어영담

유군장에 발포가장이며 영군관인 훈련봉사 나대용

우부장에 보성군수 김득광

후부장에 녹도만호 정운

좌척후장에 여도권관 김인영

우척후장에 사도첨사 김완

한후장에 본영군관으로 있는 급제 최대성

참퇴장에 본영군관으로 있는 급제 배응록

돌격장에 본영군관으로 있는 이언량


이순신은 4월 30일에 출동하기로 하고 적이 침입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경상우수영 관할의  남해현 미조항과 상주포, 곡포, 평산포의 현령, 첨사, 만호 등에게 ‘당일 군사와 병선을 정비하여 중로에 나와서 대기하라.’는 내용의 공문을 29일 새벽에 보낸다. 그런데 그날 오후 공문을 가져갔던 순천수군의 이언호가 남해현 성안의 관청과 민가들이 모두 비었고 현령 이하 관리와 백성들이 대부분 도망가고 없다는 보고를 올린다. 이 보고를 들은 이순신은 남해현에 식량이 그대로 남아있으면 적에게 넘어갈 수 있으므로 창고와 무기고를 불태우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 사실에 대하여 남해현령 기효근은 원균과 함께 전투준비 중이었는데 이순신이 잘못된 명령으로 아까운 식량을 다 태워버렸다고 비판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이건 엄연히 기효근이 잘못이다. 정말 전투준비로 자리를 비웠더라도 자신이 없는 동안 관청을 책임질 군관 한 두 명만 남겨두었더라면 이순신도 괜히 식량을 불태울 리가 없다. 하지만 남해현에 현령이나 식량과 무기를 관리할 군관, 관리가 전혀 남아있지 않은 상황이라면 이게 적에게 넘어갈 것을 우려하는 건 당연한 일이고, 따라서 우리가 확보할 형편이 아니라면 차라리 불태우는 게 더 낫다. 이순신은 지극히 당연한 판단을 내린 것뿐이고, 잘못은 자리를 비우고 관리를 잘못한 기효근에게 있는 것이다.  


이순신은 전라우수사 이억기로부터 30일 출발한다는 연락을 받고 이를 기다리기로 하면서 당초 30일로 잡은 출전일자를 연기한다.. 그러나 이후 전라우수영과의 연락은 끊어지고 더 이상 지체하기 어렵다는 정운 등 휘하 장수의 건의에 따라 이억기에게 뒤따라오라는 공문을 남기고 5월 4일 첫 출전을 하게 된다.


전라좌수영 함대의 구성은 판옥선 24척, 협선 15척, 포작선 46척 등 총 85척이었다. 그러나 협선은 승선인원 5명 이하의 소형선박이고 포작선은 어선에 불과하여 실질적인 전력은 24척의 판옥선이 전부였다.


셩상도로 넘어가 소비포 앞바다에서 1박을 한 전라좌수영 함대는 5일 새벽 경상우수영과 합류하기로 한 당포로 이동하지만 원규느이 경상우수영 함대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순신은 경쾌선을 보내 빨리 당포로 오라는 공문을 전달하고, 6일 오전 원균은 판옥선 1척을 끌고 당포로 도착한다. 이어서 그 도의 여러 장수인 남해현령 기효근, 미조항첨사 김승룡, 평산포권관 김축 등이 판옥선 1척에 같이 타고, 사량만호 이여념, 소비포권관 이영남 등이 각각 협선을 타고, 영등포만호 우치적, 지세포만호 한백록, 옥포만호 이운룡 등이 판옥선 2척에 같이 타고 5일과 6일 사이에 속속 뒤따라오면서  전라좌수영과 경상우수영의 조선 수군 연합함대가 구성되었다. 사실 말이 좋아서 연합함대지 원균의 경상우수영 함대가 이순신의 전라좌수영 함대에 편입되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리라.


이튿날인 7일 함대가 옥포 앞바다에 이르렀을 때, 척후장 사도첨사 김완이 신기전을 쏘아 적선의 출현을 알린다. 이순신은 휘하 함대에 ‘가볍게 움직이지 말고 침착하게 태산같이 신중한 행동을 취하라.’라고 명령한 뒤 전열을 지어 옥포 바다 가운데로 들어간다. 일본 선박들은 30여척이 옥포 선창에 정박하고 있었는데 거제도의 오포만 일대를 약탈하고 있었다. 이들은 조선 수군을 발견하고 허둥지둥 급히 배에 타서 선봉 6척이 맞서 싸웠다. 이들은 조총을 쏘며 대응하였으나 조선 수군의 우수한 화기에 모두 격파되었다. 이 전투에서 조선 수군은 일본의 대선 13척, 중선 6척, 소선 2척 등 모두 26척을 격파하는 전과를 올렸다. 조선 수군의 첫 승리인 옥포해전이었다.


이순신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산에 오른 적들까지 사부들을 동원하고 추포하고자 했으나, 거제도의 산세가 험하고 수목이 울창한데다가 군선에 사부들이 없으면 포위당할 염려가 있고 날도 어두워져가므로 영등포 앞바다로 물러 나와 군졸들에게 나무하는 일과 물긷는 일을 명령하고 밤을 지낼 준비를 하였다.


그런데 그 도중에 다시 적선이 나타났다는 척후장의 보고를 받고 추격하여 웅천 합포에 이르러 적선을 5척을 분멸하고, 창원땅 남포 앞바다에 이르러 결진하여 밤을 지냈다.


다음날인 5월 8일 새벽에는 진해 당 고량포에 일본 군선이 머물고 있다는 첩보를 받고 즉시 출발하여 주변을 수색하여 13척의 적선을 발견하였다. 민가를 약탈한 일본군은 조선수군의 기습에 놀라 배를 버리고 산으로 올라갔다. 조선 수군은 그들의 빈 배를 공격하여 13척 모두를 분멸하였다. 이것이 세 번째 전투인 적진포 해전이다.


조선 수군은 이 전투를 마치고 아침 식사 후 휴식하던 중에 적진포 근처에 살던 향화인(向化人: 귀화자. 이 경우는 임진왜란 이전에 조선에 귀화한 일본인) 이신동이 아기를 업고 산에서 내려와서 일본군의 침략, 약탈 행위와 그 때문에 노모와 아내 등 다른 가족과 헤어진 일에 대하여 증언하였다. 이순신은 이신동의 처지가 딱하고 적에게 사로잡힐 가능성도 있어서 수군과 함께 데려가려고 했지만, 이신동은 헤어진 가족을 찾기 위하여 이 제안을 거절하였다. 하지만 이신동의 증언은 조선 수군 장병들에게 적에 대한 분노와 전의를 다지게 하는 계기를 주면서 천성, 가덕, 부산 등지로 향하여 적을 섬멸할 계획을 세우게 하였다. 하지만 일본 군선들은 지세가 좁고 얕은 곳에 정박하여 판옥선이 활동하기가 어렵고, 전라우수영도 합류하지 않아 세력도 부족하기에 보완할 계획을 마련하려던 중 전라도 도사 최철견으로부터 선조의 평양행 소식을 들었고, 이후 회항하여 5월 9일 정오 무렵에 전라좌수영으로 귀항하였다.


이렇게 하여 조선 수군의 제1차 출전은 육전과는 다른 양상으로 조선군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 이 때 상대한 일본 군선들은 도도 다카하라와 구키 요시다카 휘하였다고 전한다.


그런데 이런 전투 중에서 우리의 원균은 어떤 공을 세웠을까? 원균 관할이었으니 원균이 길 안내를 했을 거라고도 하지만 (그런데 부임한지 몇 달 안 되서 준비가 안 됐다지 않았나?) 이순신이 올린 장계에 나온 내용은 다르다. 공은 커녕 오히려 전라좌수영이 사로잡은 적선을 빼앗으려고 아군에서 활을 쏴서 2명이 상처를 입었다. 이순신이 모함한 거라고? 그럼 증거가 있는가? 나중에 이순신이 잡혀들어 갈 때 원균 아들을 모함했다느니 명령을 어겼다느니 같은 죄목으로 하옥하였는데, 이 죄목들은 나중에 말하겠지만 근거가 없이 날조된 것들이었다. 그런데 이 승전장계에서 경상우수영에서 전라좌수영 군선으로 활을 쐈다는 이야기는 그 날조된 죄목에도 끼지 못했다.


이순신은 장계를 올리면서 부하들의 공로를 하나하나 짚어가면서 철저히 기록하였다. 그런데 혹자는 경상우수영 장수들의 공로는 보고하지 않았으므로 이순신이 잘못한 거란다. 물론 경상우수영 소속이었던 이운룡, 우치적, 이영남 등은 상관인 원균 과는 달리 잘 싸운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왜 이순신이 그거까지 보고해야 하나? 군대를 다녀오신 분들 생각해보시라. 1분대장이 분대원들의 상태를 위에다 보고 하려는데 2분대 분대원들의 상태까지 보고하면 2분대장은 1분대장을 “내 분대원까지 챙겨주는 참 군인이로구나.”라고 생각겠는가, “지가 뭔데 내 분대원 일까지 상관이야?” 라며 화를 내겠는가? 군대를 안 가신 분들이라먄 학교나 직장을 생각해보라. 학교에서 담임이 옆 반 학생상태까지 교장에게 보고하거나, 부장이 이웃 부서 인사고과까지 챙기겠는가?  이순신이 전라좌수영 장수의 공로만 보고한 건 당연하다. 경상우수영은 자기 관할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운룡, 우치적, 이영남이 공을 인정 못 받은 건 원균의 잘못이지 이순신의 잘못이 아니다.


그런데 어쩌면 “그럼 장계를 약속대로 공동으로 올렸으면 문제없었을 거 아니냐? 그러니 몰래 혼자 올린 이순신에게 잘못이 있다.”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택도 없는 소리다. 이 문제는 말하자면 길어지니 다음 편에서 논하겠다.


덧글

  • 행인1 2007/01/09 23:12 #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이순신은 당시로서는 엄청난 결단을 내렸군요.
  • rezen 2007/01/09 23:43 #

    연명장계건은 참 기가차서...
  • 을파소 2007/01/10 16:38 #

    행인1/ 그래도 민준의 서장이 있어서 부담을 덜었죠.

    rezen/ 이미 잘 아시겠지만, 얼마나 기가 차는 일인지를 곧 올리겠습니다.
  • zert 2007/01/26 10:59 #

    원균은 뛰어난 명장이고, 맹장 입니다.
    일본측 입장에서-_-;

    싸워보지도 않고 도망을 치니 과연 명나라 장수요, 쓸모 없음이 오장육부의 맹장과 같습니다(출처는...아실듯^^)

    정말 좋은 글 올려주시는 군요.

    저도 비슷하게 임진왜란사에 대해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미약한 글이지만 가끔 올리고 있으니 심심하시면 들려주세요^^


    링크 신고 합니다.
  • 이재우 2007/01/26 13:42 # 삭제

    zert님/ 그래도 명군 장군들 중에는 열심히 싸운 사람들 꽤 있지요. 원균은 심지어 은영전의 도손보다 더 무능해 보이니...
  • 을파소 2007/01/26 22:38 #

    zert/ 링크 감사합니다. ^^

    그 출처는 알만하군요. 앞으로도 자주 찾아주세요.
  • 슈렉 2010/12/01 12:20 # 삭제

    왜곡의 극치 이군요.
    어떻케 이런 생각을 할수 있는지요.
    도데체 어떻케 이런 사고를 가지고 이 수많은 글들을 쓸수가 있는지요.
    무릇 장수란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 제일 우선입니다.
    국토가 전란에 휩싸여 풍전등화의 위기를 겪고있는 이 마당에 (그래서 편의종사라는 제도를 두엇지요)
    함부로 군대를 움직이면 혹시라도 반란죄를 뒤집어 쓸까봐 쉽게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구요?
    왜적을 쫓아 국가를 위하여 싸우러 가는것을 반란죄로 모는 나라가 어디 있으며
    그렇게 의심하는 장수가 있디 있겠는 지요......답답합니다......
    마치 옆마을에 불이 났는데 불을 끄러 도와주러 간다면 근무지 이탈했다고 추궁당할것을 두려워해서 출동치 않는 소방서장하고 무엇이 다른지요...

    남해현의 식량및 무기창고에 불을 낸것이 당연하다고요?
    남해현령 기효근이 원균과 전투준비 였으나 식량과 무기를 관리할 군관을 남겨 놓치 않았으니
    불을 낸 이순신이 무엇이 잘못 이냐구요?
    님!
    이순신도 인간입니다 신이 아닙니다. 그도 때로는 실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님은 충무공을 신의 반열로 올려 놓으려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억지논리를 폅니다.
    그것은 진정 충무공을 위한 행동이 아닙니다.
    님이 진정으로 충무공을 존경하고 선양한다면 그의 허물도,과오도 인정하고 사랑해야 할줄 압니다.
    선조로 부터 출전명령을 1592년 4월 27일에 받습니다.
    이순신은 1592년 4월 28일 밤에 출전장계(4월 30일에 출전)를 올립니다.
    여기서의 출전은 군대를 이끌고 경상도로 가서 원균과 함께 왜적을 무찌른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출전은 않코 도리어 바로 옆마을 남해현의 무기와 식량창고에 불을 지릅니다.
    아군을 공격한 꼴이 되지요.
    이해가 갑니까?
    연합함대를 이끌 당사자의 무기와 식량창고에 불을 지른것 입니다.
    그 무기와 식량이 나중에 조선의 연합함대에 큰 보탬이 될지도 모르는데도 말입니다.
    그런데 이걸 호도해서 담당군관을 남겨놓치 않은 기효근의 잘못이라고 하시니........
  • 을파소 2010/12/01 12:55 #

    아군이 챙결 여력이 없는 물자는 어찌 하면 좋다고 생각하시나요?
  • 성산 2012/04/29 16:47 # 삭제

    나라의 존폐가 걸렷는데 군령이 어디있고, 국법이 어디있냐구요? 조선에 있습니다. 군령을 어겼다면 아무리 승전장이라고 해도 목이 달아나고 국법을 어겻다면 아무리 만고의 충신이라도 탄핵당하고 역도로 몰리는 것이 조선이라는 나라입니다. 그리고, 저 당시에는 전라도에는 아직 몽진의 소식이 전해지지 않았다는 것도 염려하셔야죠. 한성에 국왕이 두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있는데, (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군사를 함부러 움직였다가 목달아날 꺼라고 생각하는건 당연지사겟지요? 슈렉님이 말씀하신대로 이순신 장군님도 인간이니까요. 적에게 죽을지 언정, 국법을 어겼다고 역도로 몰려 죽는건 싫으셨겟지요.
  • 슈렉 2010/12/01 14:07 # 삭제

    님!
    자꾸 이위와 같은 글을 남기시면
    님의 명성에 해가 됩니다.

    전라좌수영 본영인 여수와 남해현은 지근거리 입니다.
    하지만 원균함대와 만날 장소는 거제 인근지역으로 수백키로의 거리입니다.
    적군이 남해현의 무기와 식량을 탈취 하려면 연합함대가 궤멸한 후에나 가능 합니다.
    그렇케 걱정이 된다면 그때 불을 질러도 얼마든지 시간은 충분하지요.

  • 성산 2012/04/29 16:36 # 삭제

    ㅋㅋㅋㅋㅋㅋㅋ아나 불멸의 이순신에서 순천부사 권준은 제대로 왜곡된 분이시네요;; 참전하지도 않았던 노량해전에서 참전했다 하질 않나, 옥포해전에서도 참전 안하셧어요? -_-;;; 드라마에 무슨 생각으로 집어넣은거지...

    제가 참 늦게 적었는 댓글이라지만, 슈렉님도 집요하시네요 -_-;; 저기, 당장에 일본군 군선의 수만 고려해도 최악의 상황을 고려해야 하는 판국에, 이길 수 있으니까 청야를 하지 않는 다는게 말이 되나요......? 당장에 담당할 지휘관도 없는 낙동강 오리알 같은 군비를 챙겨가지 못한다면 만일을 대비해서 없에는것도 님이 말씀하시는 '후일을 대비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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