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침공을 꿈꾸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한 때 포르투갈 함선을 구입하려 시도하고조선 사정에 밝은 군대 안내자를 임명하는 등 전쟁준비를 착실히 해나갔다. 1591년에는 자신은 태합으로 물러나면서 관백 자리는 조카 도요토미 히데쓰구에게 물려주고 실무를 관장하게 하고 자신은 중대사를 관장하였다. 이 무렵 히데요시의 첩이 나은 아들이 죽자 히데요시는 슬퍼하며 자신의 상투를 자르고, 주변의 가신들도 따라서 상투를 자르는 일이 있었다. 이 일은 전쟁준비를 더욱 가속화시킨다.
1592년, 전쟁은 실행을 남겨놓게 되었다. 일본은 조선의 행정구역을 경상도는 백국, 전라도는 적국, 충청도와 경기도는 청국, 황해도는 녹국 등으로 구분하였다. 이는 일본의 분국제를 적용한 것으로 미리 식민지 행정체제를 결정한 셈이었다.
출동병력은 28만명으로 육군은 1번대에서 16번대까지고 수군은 별도로 1만명을 편성하였다. 선봉대인 1번대장에는 고니시 유키나카, 2번대에는 가토 기요마사, 3번대장에 구로다 나가마사, 4번대장에 모리 요시나리가 임명되었다.
그리고 1592년 4월 13일, 고니시가 이끄는 병력이 대마도를 떠나 부산으로 향함으로 전쟁은 시작되었다. 당시 일본군의 조선 침공에 있어 첫 번째 관문은 바로 부산진성이었다. 그래서 고니시의 사위인 대마도주 소 요시토모는 정찰병을 이끌고 상륙하여 경계 상황을 정찰하였다. 당시 부산진성은 수군 첨절제사 정발이 지키고 있었다. 그는 일본군이 상륙하자 부근 해안의 선박을 이용하지 못하도록 모두 침몰시키고 성내의 군민을 모아 방어태세를 갖추었다. 이튿날인 4월 14일, 전투가 시작되어 정발 휘하 조선군은 치열하게 싸웠으나 부산진성은 결국 함락되고 말았다. 곧이어 인군에 있던 첨사 윤홍신이 지키던 다대포진도 함락되었다.
울산에 있던 경상좌병사 이각은 일본군의 침입을 보고받고 동래성으로 향했으며, 경상좌수가 박홍도 예하 병력을 집결시켰으나 곧 자신만 달아났다. 이각 역시 일본군이 동래성을 향해 접근해오자 원병을 보내겠다며 성을 빠져나갔다. 동래부사 송상현은 고니시가 명나라를 칠 것이니 길을 빌려 달라 하자 “싸워서 죽기는 쉬워도 길을 내주기는 어렵다.”며 거부하였고, 결국 치열한 항전 끝에 장렬히 전사하였다.
군사 300을 이끌고 동래성을 구원하러 가던 밀양부사 박진은 경상좌병사 이각을 만나 소산 부근에서 진을 치고 일본군의 북진을 막으려 했으나 병사들이 적군의 기세에 눌려 전투를 하기도 전에 흩어져버려 할 수 없이 박진은 밀양으로 돌아가고 이각은 언얀을 향해 북상하였다. 이 곳에서 이각은 도망친 박홍을 만났으나 한 지역의 최고 군사책임자들이면서 휘하에 병사들이 없기에 별다른 방안도 세우지 못하고 이각은 울산의 좌병영으로, 박홍은 밀양방면으로 행했다.
한편 울산의 좌병영에서는 관할 지역의 군현에서 모인 병사들이 이각의 지휘를 받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휘관들이 겁을 먹고 도망가자 병사들도 일본군이 울산에 이르기도 전에 흩어지고 말았다. 밀양부사 박진은 양산과 밀양 사이의 작원관에 진을 치고 일본군을 저지하려 했으나 일본군에 밀려 퇴각하고, 밀양성의 무기고와 군량고를 불태우고 탈출하였다.
4월 19일 텅 빈 밀양성을 점령한 고니시는 21일 대구로 진출하였다. 대구에는 경상감사 김수에 의해 소집된 문경 이남 지역 군사들 중 일부가 집결하여 한양에서 자신들을 지휘할 장수가 내려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으나 아무런 소식이 없고, 식량마저 떨어지고 일본군이 점점 접근해오자 결국 모두 흩어지고 수령들도 뿔뿔이 헤어지고 말았다. 결국 대구도 무혈점령한 고니시는 24일 낙동강을 넘어 선산 방면으로 진출한다.
가토가 지휘하는 2번대는 18일에 상륙하여 부산에서 동북쪽으로 진출하여 언양, 경주 등을 점령하여 갔고, 구로다가 이끄는 3번대는 낙동강 하구 죽도에 상륙하여 김해, 창원 등을 점령하며 북상하였다.
조선 조정에서는 17일 박홍이 보낸 장계가 도착하고서야 일본군의 침입을 알았다. 그러나 이 때까지만 해도 조정은 왜구의 대규모 난동 정도로 여기고 제1선에서 충분히 격퇴할 거라 여겼다. 그러나 뒤이어 부산진성, 동래성의 함락사실이 전해지자 그제야 전면전의 발발을 인지하고 조령, 죽령, 추풍령 등 요충지에 대한 방어를 계획하였다.
그래서 조정은 먼저 순변사 이일로 하여금 적을 막도록 하였다. 이일은 조령 방어를 위해 도서에서 군사 300명을 모아 출전하려 했으나 모병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60여명을 겨우 모을 수 있었다. 이런 책임을 물어 선조는 병조판서 홍여순을 파직하고 김응남을 새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경상우병사로 내려간 김성일을 일본의 침입이 없을 것이라 보고한 책임을 물어 체포하여 압송하다가 직산에 이르렀을 때 석방시켜 경상우도 초유사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전시 상황 수습을 위해 도제찰사를 전방에 파견하기로 하고 좌의정 유상룡을 도제찰사, 병조판서 김응남을 체찰부사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문관인 도제찰사보다는 병사 지휘가 가능한 무관을 파견해 현지 병사들을 지휘하는 것이 좋다는 의견에 따라 한성판윤 신립을 삼도순변사, 전 의주목사 김여물을 종사관으로 임명하여 일본군의 북상을 저지하려 하였다.
한편 군사 60명과 함께 서울을 떠난 이일이 조령을 넘어 경상도 문경에 도착했을 때 성은 텅 비어 있었다. 상주에 들어갔을 때는 상주목사 김해는 순변사를 맞이한다며 사라졌고 군사들마저 흩어진 상황이었다. 그나마 혼자 빈 성을 지키고 있던 판관 권길이 모은 군사들은 훈련이라고는 받아본 일이 없는 농민들이었다.
이 때 고니시의 부대는 상주에서 남쪽으로 20리 떨어진 장천까지 와서 진을 치고 있었다. 이를 한 백성이 이일에게 제보하자 이일은 상을 주기는커녕 민심을 어지럽혔다는 죄목으로 처형하였다. 그리고 이어진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오합지졸이나 다름없는 이일 휘하 조선군은 여지없이 패배하였고 겨우 도망간 이일은 문경에서 패전보고를 올린 뒤 충주로 가서 신립 휘하에 들어갔다.
한편 상주를 점령한 일본군은 4월 26일 문경을 공격하였다. 이 때 성이 텅 비어 있자 지금껏 많은 성을 무혈점령한 일본군은 안심하고 들어서다가 갑작스런 화살 공격으로 선봉에 선 군사 몇 명이 쓰러졌다. 문경현감 신길원이 20여 명의 결사대와 함께 매복하고 있다가 기습한 것이었다. 지역의 최고 군사책임자들이 도망가기에 급급했던 것에 비하면 비장한 자세였으나 이내 일본군에게 참살당하고 말았다.
신립은 김여물과 함께 남하하면서 군사 8천을 모아 충주 남쪽의 단월역에 진을 쳤다. 그리고 충주목사 이종장과 김여물을 이끌고 지형을 정찰하였는데 그 결과 김여물은 적이 대병력이므로 정면으로 싸우는 건 위험하고 험지에 복병을 설치하여 협공 하던가 한성으로 물러나 한성을 지키자는 의견을 보이고 이종장도 동의하였다. 그러나 신립은 적은 보병이고 아군은 기병이며, 아군인 훈련이 미숙하니 사지에 빠져야 투지를 발휘할 것이라며 배수진을 쳐야한 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신립의 생각대로 조선군은 4월 28일, 탄금대로 이동하여 배수진을 쳤다. 흔히 이를 두고 신립이 전술적 식견이 부족한 것이라 생각하기 쉽다. 그런 신립으로서는 조선군이 기병이라는 이점을 살릴 필요가 있고 또한 훈련이 부족한 조선군이 도망칠 가능성이 많으므로 배수진을 선택한 것은 의미 있는 선택이었다. 이미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병사들이 먼저 달아난 사례가 많음을 볼 때 신립의 생각이 이해 안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신립의 계산에 들어가지 못한 악재가 있었으니 탄금대가 저습지라 기병이 활동하기 불편하다는 것이었다. 거기에 일본은 당시의 신무기인 조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물론 조총으로 무장한 비율은 20% 가량이고, 조선군이 화약무기를 모르는 것도 아니지만, 위협요소가 되는 건 사실이었다.
28일 정오 무렵 고니시군이 도착하여 신립 휘하 조선군과 접전이 벌여졌다. 신립은 처음에는 일본군을 개전 이후 최초로 격퇴시켰으나 끝내 전세는 기울어지고 말았다. 결국 신립은 최후의 총공격을 명령하고 싸우다가 패색이 짙어지자 남한강으로 투신해 자결하였다. 김여물과 이종장도 마지막까지 싸우다가 전사하였으나 이일은 이번에도 용케 살아남아 조정에 패전 보고를 올리고는 북쪽으로 달아났다.
조정이 믿고 있던 신립이 패한 이후 더 이상 육지에서 일본군을 막는 건 없었다. 일본군은 그야말로 파죽지세로 한양을 향하여 진격하였다.
충주전투의 패전소식을 들은 조정은 서울을 버리고 파천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대한 반대여론도 강했으나 결국 파천을 진행되고 왕의 유고시 대리자가 필요하기에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고 분조를 이끌게 하였다. 그리고 4월 30일, 선조는 비를 맞으며 몽진 길에 나서니 그를 따르는 자는 겨우 100명 남짓이었다. 임금이 도망쳐 궁궐이 텅 비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백성들은 궁궐로 몰려갔다 이 과정에서 노비문서가 보관된 장예원을 비롯하여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등의 궁궐들이 일본군이 입성하기도 전에 불타버렸다.
몽진 길에 나선 선조는 왕이라기에는 그 신세가 비참했다. 임진강 나루에 이르렀을 때 허기에 지친 선조는 내시에게 술과 차를 내올 것을 명했으나 아무것도 내올 것이 없었고 어느 의원이 상투 속에 간직한 사탕 반 덩어리를 강물에 타서 바쳤다. 그리고 간신히 나룻배를 찾아 강을 건넌 뒤에는 임진강에 있는 모든 배를 불태우고 민가를 헐어 뗏목으로 활용하지 못하게 하였다.
수도는 보름 만에 함락당하고 임금은 도망가는 등 조선은 건국 200년 만에 최대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가장 믿었던 신립마저 패한 상황에서 모든 상황은 암울해 보였다. 하지만 아직 조선의 운이 다한 건 아니었다. 조선을 위기에서 구할 희망은 바로 남쪽 바다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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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rezen 2007/01/01 23:10 # 답글
이일 상당히 질기더군요.
을파소 2007/01/02 00:53 # 답글
생명력 하나만큼은...ㅡㅡ;
2071 2007/01/02 23:11 # 답글
섬광걸고 집중걸고 매턴에 임하는 이일 씨 (.....)그나마, 저렇게 견디기라도 한게 어딘가 싶기도 합니다.
을파소 2007/01/02 23:18 # 답글
나름대로 능력이라면 능력입니다만...ㅡㅡ;
ttttt 2011/05/02 17:48 # 답글
왜란때 우리 장수들도 다르지 않군요.좋은 사람은 일찍 죽고, 썩을 놈들은 잡초처럼 질기고..
세상사가 다 그런가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