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과 원균 바로보기(8)- 다가오는 전란

 

일본은 1467년에 있은 오닌의 변을 계기로 하여 무로마치 막부가 붕괴하고 각지의 다이묘들이 싸움을 벌이는 전국시대를 맞이하였다. 그러던 중인 1543년 한 화약무기의 제조법이 일본에 전해지게 되니 이것이 바로 우리가 아는 ‘조총’이었다. 일본에서는 이를 ‘철포’라고 불렀고 이를 운영하는 부대를 철포대라 하였다.


당시만 해도 일본의 다이묘들은 통일보다는 자신의 세력확장이 목적이었으나 본격적인 일본 통일의 야심을 가지고 이런 철포대를 전술적으로 활용한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오다 노부나가이다. 오다는 세력 확장을 위해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끌어들이는 한편, 1575년 나가시노 전투에서 기마대를 주력으로 하는 적에 맞서 철포대를 주력으로 하는 전술을 펼쳐 승리를 거둔다. 조총은 한번 사격 후 장전 및 화승에 불을 붙이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단점이 있었다. 이렇게 되면 발사속도 면에서는 활에 못 미치게 된다. 오다는 이를 철포대를 3열로 배치함으로 해결하였다. 맨 앞열이 사격을 하면 그 뒷열이 사격을 하고 그동안 이미 사격을 한 열은 다시 사격준비를 하는 방법을 통하여 적의 기마대를 격퇴한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오다 노부나가는 일본 통일의 야망에 다가가게 되었다.


오다의 부하 중에는 한낱 심부름꾼의 신세에서 신임받는 무사로 출세를 하는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도요토미 히데요시, 어릴 때 이름은 고자루였다. 고자루는 교코 근방 작은 마을에서 하급 무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5세 때 집을 떠나 마쓰시타라는 영주의 조리토리-주인의 짚신을 들고 따라 다니는 일-를 하게 되었다가 동료들의 질시로 모함을 받아 떠나게 된다. 그 후 아버지의 유언을 기억해 만난 인물들의 추천으로 다른 주인을 섬기게 되니 바로 오다 노부나가였다. 충실함으로 오다의 신임을 얻어가던 고자루는 태풍으로 성곽 축대가 붕괴할 지경에 이르자 복구계획을 세우가 이를 수리해 보다 큰 신임을 얻는다. 그 후 1561년에 결혼을 하고 이름을 기노시타 도키치로로 바꾸었다가 다시 하시바 히데요시로 개명한다.


1582년, 히데요시가 전쟁을 하면서 요청한 구원병 문제로 오다는 교토 본능사에 머물었다. 그 때 오다의 또다른 부하인 아케치 미쓰히데는 히데요시의 출세로 위협을 느끼는 가운데 오다가 아직 점령하지 않은 영지를 가지라며 자신의 영지를 빼앗은 것에 대한 불만 및 위기감으로 오다 노부나가를 배신할 결심을 한다. 결국 일본 통일을 눈앞에 두고 있던 오다 노부나가는 49세의 나이로 부하의 배신으로 죽음을 맞이한다.


이 사실을 안 히데요시는 아케치를 치기 위해 부하 고니시 유키나카를 앞세워 강행군하여 진격한다. 이에 밀린 아케치는 도망치다 백성들의 창에 찔려 죽는다. 히데요시는 여세를 몰아 오다 노부나가의 아들 오다 노부타가를 앞세워 나머지 부하를 토벌하고 정벌전쟁을 벌여 시코쿠와 규슈 지방을 복속시킨다. 그리고 큰 세력으로 남아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와는 타협하여 분쟁을 막았다. 1585년에는 관백으로 임명되고 천황으로부터 도요토미라는 성을 받는다. 결국 아케치의 반란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길을 열어준 셈이었다.


일본의 사실상의 지배자가 된 히데요시는 신분 간의 이동을 금지하며 유럽에서 온 선교사와 상인들을 추방시키는 등의 정책을 실시하였다. 다만 무역은 계속 허용하였다.


그럼 조선의 상황은 어떠했을까? 문정왕후의 죽음으로 인한 윤원형의 실각과 선조의 즉위 등을 거치면서 사화의 피해자였던 사림은 마침내 훈구파를 밀어내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하지만 오래가지 않아 사림파도 둘로 나뉘게 된다. 이조전랑직을 둘러싸고 김효원과 심의겸이 갈등하게 되는데 심의겸을 김효원을 윤원형의 식객이었다고 비난하고 김효원은 명종비 인순왕후가 누잉인 심의겸을 외척이라 비난하여 결국 사림들이 패를 나누게 되니, 심의겸이 도성 서족에 살아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서인, 김효원이 도성 동쪽에 살아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동인이라 하였다. 서인의 주요 인물은 박순 윤두수, 정철 등인데 학맥상 이이와 서경덕의 계보를 이었고, 동인의 주요인물은 김성일, 유성룡, 정인홍, 이산해 등이니 주로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의 제자들이었다. 


당쟁으로 처음에는 동인이 정권을 차지하였으나 1589년의 정여립 사건을 계기로 상황은 역전되었다. 정여립은 본래 서인이었으나 율곡 이이 사후 동인으로 전향하여 서인들의 비난에 직면하자 전라도 진안으로 낙향하여 대동계를 조직한다. 그런 던 것이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고변이 들어오고 관군이 체포하러 오자 자살하였다 하는데 일설에는 정여립은 자살이 아닌 타살된 뒤 그렇게 보고되었다고 한다. 최근에는 정여립을 새로운 세상을 꿈꾼 혁명가로 보는 시각도 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서인 정철의 주도로 한바탕 피바람이 몰아치는데 동인들을 비롯한 연루자들이 대거 사망하여 1천여 명에 이르며 한 때 서산대사와 사명대사까지 연루 의혹을 받았다.


이 때의 피해자 중에는 이순신을 비변사에 추천했던 정언신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를 계기로 동인이 실각하고 서인 정권이 들어섰다. 하지만 이도 오래 못 가고 토정 이지함의 조카 이산해의 계략으로 정철이 세자 책봉문제에 있어 선조가 인빈의 아들 신성군을 총애함을 헤아리지 못하고 광해군의 책봉을 주장하다 실각하니 다시 동인이 집권한다. 이 정청의 처벌을 둘러싸고 동인은 강경파와 온건파가 대립하여 결국 분당되는데 이산해를 중심으로 한 강경파가 북인, 유성룡을 중심으로 한 온건파가 남인이었다.   


이렇게 조선 정국이 요동치는 동안 점차 전란의 위협은 다가오고 있었다. 이 때 조선은 율곡 이이의 10만양병설도 무시해가면서 전쟁위협에 둔감하였다고 알려졌지만, 사실 그렇지만은 않았다. 일단 오늘날 율곡 이이가 10만양병설을 실제로 주장하였는지도 의문을 품는 견해가 있거니와, 실제로도 전쟁에 대한 대비가 실행되었던 게 사실이다.


조선이 전쟁에 둔감하였다는 또다른 사례는 김성일과 황윤길의 경고 건이다. 1591년 봄, 황윤길을 상사, 김성일을 부사, 허성을 서장관으로 하는 통신사가 일본에 보내졌다. 이들이 대마도에 이르자 대마도주 종의지는 사신들이 앉아있는 자리에 가마를 타고 들어오니, 김성일이 이를 크게 질책하자 종의지는 가마를 메고 온 사람들 죽이고 사신들에게 사과하였다. 그 후 사신들은 극진한 대접을 받으면서 일본으로 행하였다.


하지만 정작 수도에 도착하여서는 일본은 이런 저런 핑계로 조선의 국서를 받는 것을 미루어서 다섯달이나 머무른 뒤에야 전달할 수 있었다. 통신사를 맞이하는 연회 자리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갑자기 집안으로 들어갔다가 평상복을 입고 어린 아들을 안고 돌아다니는 등 외교예절에 어긋나는 행동을 제멋대로 하였다.


연회가 끝난 후에는 상사와 부사에게는 은 4백냥을, 서장관 이하에게는 차를 선물로 주었으나 정작 답서를 받는 것은 늦어졌다. 사신들은 결국 그냥 돌아오려 하였으나, 김성일의 강력한 주장으로 몇 차례의 수정을 거쳐 가며 기어코 답서를 받고 귀환하였다. 이 때 사신들이 본 일본의 정세는 조선에게는 극히 위협적일 수 밖에 없었다.


이후로는 알려진 바와 같이 황윤길은 전쟁 가능성을 경고하였지만 정작 일본에서 강한 주장을 펼치던 김성일은 거기에 대해 반대 의견을 표명하였다. 황윤길은 서인, 김성일은 동인으로 흔히 당파가 달라서 반대한 걸로 알려졌지만 역시 동인인 허성도 황윤길의 주장에 동의하였고 동인 중에도 이에 공감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렇다면 김성일은 왜 전쟁 가능성에 대해 반대한 것일까? 이에 대한 김성일의 말이 <징비록>에 나타난다.


이때 나(유성룡)는 김성일에게 묻기를,

“그대의 말은 황사(황윤길)의 말과 같지 않은데, 만일 병화가 있으면 장차 어덯게 하려는가?”

하니 그는 말하기를,

“나도 역시 어찌 왜가 끝내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을 하겠습니까? 다만 황사의 말이 너무 중대하여 중앙이나 지방이 놀라고 당황할 것 같으므로 이를 해명하였을 따름입니다.”

라고 하였다.

-유성룡 <징비록>중에서


이 때 김성일의 주장을 받아들여 조선은 전쟁 준비를 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사실 김성일의 주장은 민심의 동요를 걱정한 것이었지, 이 때문에 전쟁준비를 포기한 건 아니었다.


이 때 가져온 일본의 국서는 ‘군사를 거느리고 명나라에 뛰어 들어가겠다.’라는 내용도 있었기에, 일본의 위협은 물론 명나라에 이 사실을 알릴지도 논란거리였다. 영의정 이산해는 일본과 사사로이 통신한 것이 책 잡힐까 두려우니 알리지 말자고 주장하였으나, 명나라가 다른 나라를 통하여 이 사실을 안다면 우리가 더 의심을 받으니 알리는 게 좋다는 유성룡의 주장이 받아들여져서 김응남을 사신으로 하여 이 사실을 명나라에 알린다.


또한 국내적으로도 전쟁준비에 착수하니, 김수를 경상감사, 이광을 전라감사, 윤선각을 충청감사로 하여서각지에서 축성 작업이 진행된다. 이런 축성작업에 대하여 김성일은 이를 중지할 것을 주장하는데, 이것도 안보불감증에 걸려서가 아니라 무리한 노역으로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지는 것을 염려하였기 대문이다. 경삼감사 김수는 경상도 일대의 축성에 노력을 기울였으나 이 역시 백성들의 원망을 샀다는 기록이 <선조수정실록>에 남아있고, 그래서 김수는 전쟁 중에도 경상감사 시절 인심을 잃어 일을 그르치게 했다며 사헌부의 탄핵을 받은 일이 있다.


<징비록>에는 합천 사람인 이노(李魯)가 유성룡에게 합천은 나룻터 건너에 있으니 성을쌓을 필요가 없다는 서신을 보냈다는 이야기가 남아있으니, 역시 국가적으로 축성작업이 진행되었다는 점을 알려준다.


심지어 개전 후 선조가 내린 교서에는 ‘ 다만 살피건대 근래 변방에 흔단이 많고 군정(軍政)이 피폐하고 해이해졌으므로 중외에 신칙하여 엄중하게 방비를 더하도록 하였는데, 성을 높이 쌓을수록 국가의 형세는 날마다 낮아지고 못을 깊게 팔수록 백성의 원망이 더욱 깊어지는 것은 정말 헤아리지 못하였다.’ 같은 내용이 들어가서 전쟁준비로 백성들이 힘들었다는 사실을 사실상 인정하였다.


결국 조선의 전쟁준비 과정에서 잘못된 방향으로의 대비책 수립이나 잘못된 축성, 혹은 무리한 노역으로 인한 민심의 이반을 비판할 수는 있어도, 전쟁이 나건 말건 당쟁에만 몰두하였다고 비판할 수는 없다. 조선은 엄연히 전쟁에 대비하였다는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런 전쟁준비 중에서 최고의 준비는 바로 이순신을 전라좌수사로 임명한 것이다. 이 인사조치가 어떤 극적인 순간들을 연출할 지는 당시로서는 짐작도 할 수 없었겠지만.


by 을파소 | 2006/10/29 22:23 | 이순신/임진왜란 | 트랙백 | 덧글(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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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kirhina at 2006/10/29 22:41
... 약간 논점과는 상관없는 얘기지만, 불멸의 이순신 홈피에 가보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인물 소개에 '오다 노부나가를 배신하고 권력을 쥔 인물' 이라고 적혀 있지요. 언제 바꾸나 지켜봤는데 드라마 종영 될 때까지도 안 고치더라구요. (먼산)
Commented by 행인1 at 2006/10/29 22:42
문제는 축성이 그전까지의 왜변에서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한 계획이었다는 것이죠. 왜변이 일어나면 성에 들어가서 농성하다가 구원군이 오기를 기다린다는 구상 같은데.....

일본군은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공성전 노하우를 축적하게 되죠.....
Commented by rezen at 2006/10/30 01:05
가장 결정적인 실수는 20만 가까운 대규모 침입을 예상하지 못 했던게 아닐까 싶습니다. 뭐 이건 그때까지 조선의 경험으론 타당한 판단이었겠지만...
Commented by 을파소 at 2006/10/30 12:46
kirhina/ 그 드라마야...ㅡㅡ;

행인1, rezen/ 확실히 정규군보다는 그동안 경험한 왜구 수준에 맞게 계획을 세운 거 같긴 합니다.
Commented by 이재우 at 2006/10/30 19:58
뭐니해도 가장 압박은 와키자카의 할복 설 아니겠습니까. 군사 제51호에 나와있는 김시민 장군의 지휘에 관한 글에서 김수가 뜯어고친 성이 김시민 장군에게 불리한 점을 주었다는 얘기를 본 적...
Commented by 을파소 at 2006/10/30 22:30
징비록을 보면 유성룡은 김수의 축성을 2차 진주성 전투의 패인으로 꼽고 있지.
Commented by 의정부 at 2009/12/03 21:45
김성일이 임진왜란에 큰책임을 져야 함이 마땅하다.
Commented by 의정부 at 2009/12/03 21:46
김성일은 저승사자중에 태사자~!
Commented by 을파소 at 2009/12/04 01:09
김성일의 임진왜란 중 행적을 보면 그리 간단히 말할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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