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과 원균 바로보기(2)-이백록은 기묘사화의 피해자인가? 이순신/임진왜란

 이순신의 가문 덕수이씨의 시조는 고려 고종 때 중랑장을 지낸 이돈수이다. 조선 세종 때는 역관 출신으로 문과에 급제한 이변이 외교와 관련된 학문인 이학(吏學)에 관심을 가졌기에, 통역관 양성의 임무를 띄고 벼슬을 받았다. 이 때 이변은 아버지의 3년상이 끝나지 않았기에 상중에 벼슬을 사양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탄핵받았으나, 세종은 이를 물리치고 이변을 등용한 것으로 보아 그에 대한 세종의 신임이 매우 두터웠음을 알 수 있다. 그 벼슬은 판부사에 이르렀으며, 중국어에 능통하여 명나라에 까지 이름을 알렸다.


이변의 손자 이거는 성종을 섬겼으며, 장령이 되었을 때는 호랑이 장령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성격이 강직하였다. 이거의 아들은 이백록이며 그 아들이 이정이고, 이정의 셋째 아들이 바로 이순신이다.


이순신의 할아버지 이백록은 흔히 기묘사화 때 죽임을 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이순신의 어린 시절을 다루면서 이순신의 할아버지 이백록이 기묘사화 때 조광조와 함께 사약을 받은 것으로 그려졌으며 이로 인한 역적의 굴레가 젊은 이순신의 발목을 잡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는 드라마 뿐 아니라 김탁환의 원작소설에도 그렇게 나타난다. 아니 비단 드라마와 소설만은 아니다. <이순신의 두얼굴>이나 <부활하는 이순신> 등 근래에 나온 저서들을 비롯하여 이순신을 다루는 인문학 서적도 이백록이 기묘사화의 피해자인 것으로 서술한 경우가 많아 이는 사실인 것처럼 알려지고 있다. 그렇다면 이들 드라마와 소설, 그외의 각종 서적들은 이백록을 제대로 다루고 있는 것일까?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는 조광조를 비롯한 기묘사화의 피해자들의 이름과 주요행적이 정리된 ‘기묘당적(己卯黨籍)’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백록의 이름을 찾을 수 없다. 이는 <조광조문집>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기묘록> 속집에는 이백록의 이름이 나오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별과시(別科時)에 천거한 사람들로 서울 밖에서 천거된 사람은 모두 1백 20명인데 천과(薦科)에 오른 사람은 28명이며 따로 14명이 전하는데, 나머지 78명은 아마도 그 착한 행실이 아주 없어질까 두려워 똑같이 기록한 듯함.(중략)

진사 이백록(李百祿)은 배우기를 좋아하고 검행하였다.(후략)

-<기묘록> 속집 중에서


이것이 기묘록 속집에 나온 이백록에 대한 기록의 전부이다. 이백록은 별과에서 추천되었을 뿐 조광조와는 관련이 없다. 아무리 사람들을 대거 숙청하는 상황이라도 그저 추천만 받았을 뿐인 진사까지 죽일 정도로 조선왕조가 잔인하지도 않았다. 더군다나 기묘사화가 일어난지 세월이 훨씬 지난 시점에서 이백록은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가 기묘사화 때 죽었을 가능성은 전무함이 드러난다.


성균관 생원 이백록(李百祿) 등이, 상께서 친히 문묘에 제향한 다음 대사례를 행하고, 쌀 2백 석을 하사하고 또 궐정에서 특별히 술과 음악을 하사하신 데 대해 전(箋)을 올려 감사하였다.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소왕(素王)을 배알하고 웅후(熊侯)를 쏘시니, 흔연히 삼대(三代)의 의례를 보겠습니다. 유생들을 모아 놓고 녹명(鹿鳴)을 노래하게 하니, 구중 궁궐의 은택을 다시 받았습니다. 신들은 문장의 조그만 기교나 학습하고 입으로만 외는 무리들로 유자(儒者)란 이름만 도둑질하고 있습니다. 정곡(正鵠)을 못 맞히면 몸을 돌이켜 생각하는 군자의 덕이 없음이 부끄럽기만 합니다. 성균관에 오시던 날 활 쏘시는 광경을 보게 된 것이 얼마나 행운입니까. 활을 쏘는 데는 힘이 아닌 덕을 주로 하시니, 덕성을 양성하심을 우러러보겠습니다. 선비들이 다 사예(射禮)를 익히니, 사를 고무시키는 인덕(仁德)에 모두들 감동하셨습니다. 이것만 해도 저희들의 영광인 것을, 하물며 성대히 대접해주기를 어찌 감히 바라겠습니다. 구온(九춠)이 많기도 하고 감칠맛 나니 정중히 술자리를 마련해 주신 은혜에 진하게 젖어듭니다. 오음(五音)이 계속해서 흐르고 음식 맛도 잊게 하는 음악이 번갈아 연주되었습니다. 즐거움은 녹명의 화락한 정경과 같고 덕화는 문왕(文王)의 시절과 같습니다. 천고에 일찍이 없었던 오늘의 대례 행사, 교문(橋門)에서 보고 듣는 것만도 다행입니다. 크나큰 은혜 궁중에서 베푸시니, 더욱 천지(天地)와 같은 자애로움을 느낍니다.”


  【원전】 17 집 530 면

  【분류】 *왕실-의식(儀式) / *사상-유학(儒學)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중종실록> 중종 29년 8월 18일


간원이 아뢰기를,

  “지평 이현당은 처 사조(妻四祖)에 장리(贓吏)가 있어 대간에 합당하지 못하니 체직시키소서.

  우리 나라 사람이 왜인과 몰래 매매하는 데 대한 금법이 엄하지 않은 것이 아닌데도 금법을 어기고 죄를 저지르는 자가 계속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왜관(倭館)의 서리(書吏)와 고자(庫子) 등이 지금 체포되어 신문을 받고 있는데, 진실로 철저히 추문하여 통렬히 다스리소서. 평시에 서리·고자·고지기 등이 장사꾼들과 교통하여 몰래 금물(禁物)을 휴대, 밤에는 기구를 설치하여 담을 넘어 들어가 매매하고 낮에는 대문을 활짝 열고 공공연히 출입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왜노들이 왜관의 문밖에까지 나와서 시인(市人)들과 이끗을 다투며 칼을 빼들고 힐난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비록 금란 나장(禁亂羅將)이 있기는 하지만 뇌물을 달게 여겨 도리어 그들을 두둔하고 방자함을 금하지 않아서 이처럼 극도에 이른 것입니다. 그런데도 왜관의 별좌(別坐) 한자(韓慈)와 이부는 금하지 않았을 뿐만이 아니라 비루한 짓을 하기까지 했다는 말이 사람들의 입에 전파되고 있으니, 파직시키소서. 방지기들도 아울러 추문하여 다스리게 하소서. 금단하는 방도를 각별히 엄하게 세워 간사하고 외람된 짓을 하는 폐단을 막으소서.

  평시서 봉사(平市署奉事) 이백록(李百祿)은, 성품이 본디 광패하여 날마다 무뢰배들과 어울려 거리낌없이 멋대로 술을 마시는가 하면 외람된 짓으로 폐단을 일으킨 일이 많으니, 파직시키소서.”

  하니, 답하였다.

  “이현당 등의 일은 모두 아뢴 대로 하라. 그리고 왜관에 대한 일은, 당초 예조의 공사를 보니 유사(有司)로 하여금 추고하게 한다고 하였는데, 나는 사람의 숫자가 많지 않으므로 각별히 조옥(詔獄)에서 추문하게 하려 했었다. 그러나 지금 예조의 공사를 보니, 금란(禁亂)은 모두 금부에 소속된 일이라지만 법에 의하면 형조에서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형조로 하여금 추문하게 하라.”


  【원전】 18 집 398 면

  【분류】 *정론-간쟁(諫諍) / *사법-법제(法制) / *사법-탄핵(彈劾) / *인사-임면(任免) / *가족-친족(親族) / *외교-왜(倭)

<중종실록> 중종 35년 6월 27일


살펴본 바와 같이 이백록은 실록에서 중종 29년과 중종 35년, 두 번에 걸쳐 등장한다.  그런데 중종 29년은 서기 1534년, 중종 35년은 서기 1540년이므로 기묘사화가 일어난 서기 1519년과는 10년 이상의 시차가 있는 것이다. 기묘사화 이후라도 이백록이 조광조의 제사라도 지내다 처벌될 수도 있겠지만 중종 35년의 실록에 나온 이백록의 죄는 무뢰배들과 어울렸다는 것이지 조광조와는 무관하다. 만일 조광조와 관련이 있다면 실록에 굳이 기록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더군다나 역모사건이라면 더욱 자세히 기록되는 게 정상이다. 하지만 그런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이백록이 위의 실록에 나온 사건 이외의 다른 일로 녹안(錄案: 처벌된 관리의 이름과 죄상을 적은 책)에 이름을 올린 일은 있었다. 그러나 이 역시 기묘사화와는 무관하다.


의정부의 의득(議得)【*.】을 정원에 내리면서 이에 의해 시행하라고 일렀다.

  【*의득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윤인경 등이 의논드리기를,

  “삼가 이정(李貞)의 진소(陳訴)를 보니, 그 아비 백록(百祿)이 중종 대왕의 국휼(國恤) 때 주육(酒肉)을 갖추어 베풀고는 아들을 성혼시켰다고 잘못 녹안(錄案)되었다. 그런데 이는 그때 경상 감사(慶尙監司)의 계본(啓本)에는 주육을 갖추어 베풀었다는 말이 없었는데 형조(刑曹)에서 함문(緘問)할 때 주육 설판(酒肉設辦)이란 네 글자를 첨가하여 아뢰어서 의금부로 옮기고는 곤장을 쳐서 복초(服招)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 계본을 상고해 보건대 주육을 설판하였다는 말은 다만 여부(女父)인 이준(李俊)에게만 언급되었고 백록에게는 언급된 바 없는데 필경 이것으로 중한 죄목이 씌워져 녹안까지 되었으니 과연 억울하다 하겠습니다. 성종(成宗)께서 승하하시던 날 밤 조사(朝士)로서 그 자녀의 혼례를 치른 자가 죄는 입은 바 있으나 다 녹안까지는 가지 않았었습니다. 위에서 재결(裁決)하소서.

  그리고 관군(館軍)이 입마(立馬)하는 괴로움이란 과연 호소한 대로입니다. 지금은 당연히 합리적으로 제도를 고쳐서 그 폐단을 바로잡는 것이 사실상 양책(良策)일 것입니다. 다만 금교(金郊) 등의 각참(各站)은 바로 중국 사신이 왕래하는 큰 길입니다. 지난 경인 연간에 너무 심하게 잔폐(殘弊)되어 회복시킬 수 있는 계책이 없었습니다. 조정에서 널리 의논한 끝에 관군을 영정(永定)하여 오로지 그 일만 전담하도록 했다가 그후 또 그들의 진소(陳訴)에 의하여 다시 5년마다 서로 교체 입역(立役)하도록 논의해 바꾸었던 것으로 그 유래가 이미 오래되어 지금 다시 고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 곳에 원래 거주하던 역리(驛吏)를 지금 만약 회복시킨다면 각 참의 관군은 양감(量減)해야 할 것입니다. 원래 거주하던 역리들의 회복 여부와, 봉수군(烽燧軍)과 제색(諸色)의 장인(匠人)들 중에서 부실(富實)한 사람을 뽑아서 아울러 관군에 정하는 데 대한 편의 여부 등을 본도 감사로 하여금 숙폐(宿弊)를 널리 찾아 묻고 겸하여 민정(民情)도 잘 살펴서 자세히 헤아려 계문(啓聞)케 한 후에 다시 논의한다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위에서 재결하소서.”

  하였다. 이 의계는 은율(殷栗) 사람 김천령(金千齡)의 상언(上言)으로 인하여 전일 의계(議啓)하라는 하교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원전】 19 집 407

  【분류】 *정론-정론(政論)

-<명종실록> 명종 1년 4월 6일


이는 5년후인 명종 1년 이백록의 아들, 즉 이순신의 아버지인 이정이 올린 진소에 따라 이백록이 녹안에서 삭제된 내용으로 이정의 진소에 따르면 이백록은 국상기간에 아들의 혼례를 하면서 잔치를 한 것이 문제가 된 것인데 잔치의 주관자는 이백록이 아닌 이정의 장인이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받아들여져 이백록은 녹안에서 삭제된다. 하지만 역시 기묘사화는 물론 명종 때 일어난 을사사화 등 다른 사화 와의 연관성도 찾을 수 없으며, 이백록이 아들이 장가가는 것까지 보며 살았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또한 유성룡이 <징비록>에서 이순신의 가계를 설명하면서 이백록은 가문의 덕으로 벼슬하였다는 것 외에는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고 있는데, 선조시대에는 조광조 등의 기묘사화의 피해자들이 신원되어, 이 시점에는 조상이 기묘사화로 죽었다는 건 역적의 굴레가 아닌 가문의 영광이 된다. 그런데도 유성룡이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다는 점 역시 이백록이 기묘사화와는 무관함을 입증하는 것이다.


결국 소설과 드라마, 그리고 각종 서적에서 다루어진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사약을 받은 이백록은 그야말로 허구라 보아야 한다. 사족으로 요즘 재방송 중인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 이백록이 사약을 받는 장면에 붉은 색 관복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붉은 색 관복이란 당상관 이상, 지금으로 치면 총리나 장관급 고위 공무원에 해당한다. 하지만 실록 내용에 나온 이백록의 벼슬은 평시서봉사로 봉사는 종8품의 벼슬이다. 종8품은 요즘으로 치자면 8급 공무원 정도로 당시 입던 관복의 색은 녹색으로, 드라마에서는 생전 못 해본 출세를 한 셈이다.


참고자료

<세종실록>

<중종실록>

<명종실록>

유성룡 <징비록>

이긍익 <연려실기술>

이한우 <세종-조선의 표준을 세우다>

덕수이씨 대종회 홈페이지 http://www.deoksoolee.com/home/main.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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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행인1 2006/09/02 22:31 #

    그나마 이 정도는 애교수준입니다...-_-;;
  • 을파소 2006/09/02 22:43 #

    행인1/ 그렇죠. 앞으로 연재가 진행되면 이보다 훨씬 경악스러운 역사왜곡도 다루게 될테니까요.
  • 이재우 2006/09/03 07:48 # 삭제

    저승에서 그 분이 드라마를 봤으면, "어이, 난 그렇게 빨리 안죽었어! 멀쩡한 나를 왜 빨리 죽인 거야!"
  • 을파소 2006/09/03 20:26 #

    이재우/ 이모PD: 대신 셍전 못 입어본 당상관 관복 입혀 줬잖아요! ㅡㅡ;
  • rezen 2006/09/03 23:08 #

    졸지에 역적집안이 된 덕수 이씨...충무공께 묵념...
  • 을파소 2006/09/03 23:53 #

    rezen/ 행인1님 말씀대로, 이정도는 애교라 할정도로 이순신 장군에 대한 음해가 많죠.
  • 설중매 2006/10/24 15:17 # 삭제

    좋은글과 귀한자료 잘보고 갑니다.
    옮겨다놓고 좀더 자헤히 읽어보겠습니다.
  • 을파소 2006/10/24 20:00 #

    설중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개인적으로 복사해서 보시는 건 상관없는데, 타사이트로 퍼가신다면 저한테 미라 말해주세요. ^^
  • 머털도사 2007/05/21 09:18 # 삭제

    을파소 님께 말씀드립니다.

    여기 있는 이순신 장군과 원균, 임진왜란에 관련된 글들을 제가 꼭 필요해서 그러니 부득이하게 가져가도록 하겠습니다. 출처는 꼭 밝히겠습니다. 혹시 필요한 일이 있으시면 제 메일 주소인 dmsens69@empal.com 로 연락 주십시오
  • 머털도사 2007/05/21 09:30 # 삭제

    용호한록 2권(龍湖閒錄二)의 제 육책(第六冊) 삼일구(三一九)의 동국문헌명신편(東國文獻名臣篇)에 보면 이백록이 기묘사화에 연관되어 처벌을 받았다고 나옵니다. 그런데, 그 처벌이란 것이 벼슬을 내놓고 시골로 낙향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사형도 유배도 아닌 낙향 수준이죠.

    그리고 기묘사화가 벌어진 지 15년 후인 1534년에 이백록은 다시 조정으로 돌아와 성균관 생원의 신분으로 중종에게 글을 올리죠. 또, 6년 후인 1540년에는 종 8품인 평시서 봉사을 지냈으니 이백록이 받은 처벌은 굉장히 가벼운 수준이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 머털도사 2007/05/23 11:29 # 삭제

    그럼 도대체 왜 이백록이 기묘사화 때 사약을 받고 죽었다는 얘기가 나왔을까요. 아마, 그가 처벌을 받았다는 말이 잘못 와전되면서 마치 사사된 것처럼 인식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실제로 이백록은 조광조와는 그다지 친분이 두터운 사이도 아니었고, 사림파의 적극적인 일원도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 황제 2009/10/10 01:41 #

    역사 왜곡을 넘어선 창작의 경지를 보고 말았죠.....
  • baduk 2014/01/13 00:34 # 삭제

    고문서 기년편고에 이백록이 기묘사류였다고 합니다. 기묘사류라고 다 사형받은 것은 아니죠. 아마도 관직박탈의 처벌을 받았겠죠. 이덕일 칼럼에서 인용했읍니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5/01/2008050101137.html
  • 을파소 2014/01/13 23:33 #

    이걸 쓸 때는 기묘사화 때 죽었다는 말이 많아 거기에 주안점을 두었습니다. 벼슬을 파직당할 정도로는 관련되었더라도, 그만큼 핵심적인 위치는 아니고 그냥 같은 무리 정도로 피해를 입은 것에 가까울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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