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과 여진족(3) 이순신/임진왜란

함경도에서도 여진족이 약탈을 하여 걱정이었지만, 평안도도 걱정은 마찬가지. 그리고 여긴 누르하치의 건주위와 가깝다. 

1595년 7월 5일에는 건주위의 여진족 90여명이 평안도 만포에 도착한다. 노략질 하러 온 건 아니고, 평화적인 손님으로 온 거로 평안병사 신잡은 잔치를 열어주는데, 건주위에서는 서계를 하나 올린다. 조선의 군관들이 이를 받지 않으려 하자 여진족들도 머리를 조아리고 잔치 음식 먹기를 거절하는 걸 달래서 일단 먹이긴 먹였다. 그리고 술잔이 오가고 여진족이 좀 취했다 싶었는지 안 받는다고 하던 서계를 몰래 꺼내 등서해서 조정에 올렸다. 

내용은 백성과 물자를 쇄환하겠다는 건데, 실상은 국경을 넘어 산삼을 마음대로 캐가려는 계책일 것이라는 게 신잡의 생각. 순순히 산삼을 내놓으면 백성을 돌려드릴 것입니다.

평안도도 무기 손실이 크고 군사도 부족한 형편인데 건주위 여진족이 국경을 들락거리는 건 달가운 일이 아니므로 산삼 캐는 건 거부해야한다고 신잡은 주장한다. 한편으로는 여진족들이 오면 잔치를 이렇게 베풀어 주지 않으면 골치 아플 수 있고, 베풀어도 변고가 생길 수 있기에 만포(滿浦)에도 진을 쳐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 보고를 접한 비변사에서는 '거기도 걱정이지만 남쪽이 당장 급하다보니 조치도 못했음'이라는 거도. 당연한 일이긴 하지만....전쟁 중 죽은 병사도 많은데다가 살아남은 병력도 당장 급한 경상도 쪽으로 상당수 투입한 상태. 이 때가 소강기라지만 영토 일부를 차지하고 있는 적이 있는 이상 우선순위가 그 쪽이 될 수 밖에...그래도 북쪽 역시 트집 잡아 변고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게 비변사의 걱정이었다. 이번의 서계도 조선의 허실을 판단하려는 구실로 파악하고, 거기에 내용도 조선을 업신여기고 침략하려는 의도가 있으니 앞일이 염려된다고 판단한다. 물론 결과적으론 적어도 누르하치는 조선을 침공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당시 시점에서 우려는 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 

게다가 함경도와는 달리 평안도는 중국과도 가깝기 때문에 적당히 벼슬 주고 달래는 것도 명나라와의 관계로 쉽지 않았다. 전에도 언급했다시피 누르하치의 파병 제안도 조선에 직접이 아니라 명나라를 통해서 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건주위와 직접 교류하는 것도 명나라 문제가 있으므로 누르하치가 힘을 믿고 나서면 그때그때 요동을 통하여 명나라에 요청해 금지하는 명령을 나오게 해야 한다는 게 비변사의 의견. 그리고 당장의 서계 건은 자문(咨文)을 지어 보내고, 평안도에서 남쪽으로 보내려던 병사들은 일단 평안도에 그대로 남아 신잡이 지휘하게 하기로 한다. 그리고 공식적으로는 서계를 받지 않았다 해도 답장을 안 하는 것도 문제가 될 수 있으므로(이건 기록에 나온 부분은 아니지만 사실 아무리 술에 취했어도 서계를 몰래 빼었다 복사하고 다시 가져다 놓았다면 픽션에 나오는 훔치기 스킬 능력자가 나선 게 아닌 이상 상대도 눈치챘을 걸 가정하고 일을 계획하는 것도 당연한 일일 테고.) 답장은 이렇게 보내기로 한다. 

쇄환한 사람이 14명이나 되니, 후의를 가상히 여긴다. 그러므로 나온 사람들에게 잔치를 베풀어 주고 또 상품을 주어 보낸다. 다만 명나라 조정에서 법으로 금지하므로 우리 나라가 그대들과 국경이 서로 가깝지만 사적으로 왕래하지 못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다. 지금 만약 명나라의 법을 어기고 전에 없었던 준례를 만들어 국경을 넘어 마음대로 삼을 캐도록 하면, 두 곳의 백성간에 사사로운 틈이 생겨 호의(好意)를 잃게 될 뿐만 아니라, 명조(明朝)에서도 반드시 옳지 않게 여길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얘기 하고도 비변사는 가만 생각해보니 조금 더 불안한 게 있어 다시 얘기를 한다. 오랑캐란 녀석들은 걸출한 놈이 나오면 이웃과 중국의 걱정거리가 되는데, 지금 누르하치가 힘을 키운 지 10년이다 보니 다른 부족처럼 대하기도 어려운 존재. 일단 이번에는 예의를 차려 문서를 보냈는데, 앞으로 대하는데 완급 조절 잘못하면 준제가 커질 수 있으므로 조심하고, 이번의 답서에서는 백성을 돌려보내는 일에 감사하면서도 뒤에서 서로 왕래하는 건 거절하되, 반드시 명나라를 언급하고, 건주위를 대하는 예는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더불어 쇄환된 이 중에 똑똑한 이를 한양으로 불러 정보를 알아보고 대책을 세우는 것도 추진하고.  

그렇게 평화롭게 오래오래 살면 좋겠지만 남쪽이 평화롭지 못한데다가 북쪽도 전란이 일어날지도 모를 일이 생기니......평안도 위원(渭原)으로 산삼을 캐러왔던 건주위 여진족이 소를 훔치다가 27명이 위원군수 김대축에게 죽는 일이 일어난다. 이 일로 건주위가 보복으로 전쟁을 일으킬 지 모른다는 우려가 제기되었고, 특히나 겨울이 되어 강이라도 얼면 더욱 넘어오기 좋기에 조선은 전전긍긍한다. 

결국 조선은 명나라의 권위를 빌려 건주위를 달래기로 하고, 이렇게하여 명나라 유격 호대수(胡大受)의 차관 여희원(余希元)이 건주위로 향한다. 그리고 조선에서는 향통사(鄕通事)(지방에서 배출된 역관) 하세국(河世國)이 여기에 동행한다. 그리고 하세국은 인단 먼저 돌아오고, 그 보고를 받은 조정에서는 일단 유격 호대수에게 하세국이 가져온 서신을 보여주고 답서를 쓰면 이를 다시 사람을 보내 전달하기로 한다. 하지만 호대수는 여희원의 보고를 기다리느라 답서 작성이 늦어지자, 호대수의 답서는 나중에 작성되면 추후 사람을 따로 보내고 일단 남부 주부(南部主簿) 신충일(申忠一)과 하세국에게 만포첨사 유염의 답서를 가지고 먼저 건주위로 가게 한다. 

이 과정에서 받은 상황에 의하면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조선의 우려는 기우가 아니었다. 하세국이 전했던 내용은  '조선이 원수가 되었으므로 오는 정월에서 2월 사이에 반드시 군사를 일으켜 보복할 계책을 하고 있기 때문에 여러 부락의 호인들을 바야흐로 모아서 군사를 훈련시키고 있으나, 조선이 이처럼 사람을 보내와서 화친하니, 특별히 흔단을 일으키는 일은 없을 것이다.'라는 거였다.

그 보다 나중에 신충일이 다녀와서 보고한 내용에서도 건주위에서는 우리는 조선 백성을 쇄환하여주엇는데, 왜 조선은 산샄캐러간 사람을 죽였는가를 다지면서 여기에 원한을 품은 뜻을 밝혔다. 이에 신충일은 그깟 풀 하나 가지고 죽인 게 아니로 무단월경을 한데다가 소까지 약탈을 하니 죽인 거라는 점을 분명히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신충일이 들은 정보에서도 누르하치는 군사 3천을 모아 강이 얼면 보복공격을 하려고 했으나, 명나라의 만류로 그만두었다고 한다.

여기에 대해선 나중에 여희원이 돌아온 후 더 듣게 되는데, 누르하치는 무단월경하여 산삼을 캔 건 잘못이지만, 잡아서 보냇으면 자기가 다 처벌했을텐데 죽인 건 잘못이라며 여기에 앙심은 품었으나 여희원과 명의 망류로 더는 문제삼지 않는다는 식으로 말하였다. 무단월경한 자를 처벌한다는 건 빈말은 아니었던 모양인지 신충일의 보고에서도 산삼을 캐고 조선에 잡히지 않았던 이들은 각 부락에서 색출하여 1인당 소 한 마리나 은자 18냥을 징수하고, 가난하여 그벌 못 내는 자는 가솔들이 몸으로 떼우게 한다는 걸 보면 벌을 주긴 줬다. 

이 건주위가 보복할 뻔한 이야기가 아니라도 신충일의 보고는 충분히 무서운 내용이다. 신충일은 몽고 쪽 사람이 방문한 걸 봐서 건주위고 몽고 쪽 부족도 복속하엿다는 걸 확인. 건주위에서도 누르하치가 있는 본거지를 성을 쌓아 방비하는 거나 군사력도 어느정도나마 보고, 요동을 통해 총통을 요청했으나 거부당했다는 사실도 확인하였다. 덧붙이자면 나중에는 조선에도 총통을 요구하였지만 역시 거절당했다. 훗날 누르하치는 죽으면서 총통을 이 때 받지 못한 게 못내 한스러웠을지도 모르겠다. 명이나 조선은 자기네 무기로 공격당했을지도 모른다는 소리지만.

그리고 건주위는 "우리는 조선 백성도 쇄환해주었는데 조선은 도렬보내면 우리거 벌 줄걸 죽여가지고...." 라고 불평했지만, 모든이가 쇄환된 건 아니다. 신충일은 그 곳에서 조선 백성도 만났는데, 임해군의 종이었다가 전란레 휩쓸려 잡혔다가 팔려온 자나 함경도에서 여진족의 공격을 당한 감파 출신이라는 아이 등을 보면 건주위는 직접 약탈은 자제해도 다른 여진 부족이 납치한 조선인을 노예로 사들였다는 걸 알 수 잇다. 그 중 일부는 쇄환해주었지만, 모두 보내줄 정도로 인도적이진 않았다. 

건주위가 신충일을 통해 조선을 대하는 태도도 그리 '부모의 나라'로만 여기진 않은 듯 하다. 누리하치가 부하를 시켜 말하길 ‘지금부터 두 나라는 한 나라와 같이 지내고 두 집은 한 집과 같이 지내면서 영원히 우호를 맺어 대대로 변하지 말자.’라고 했다는데, 이게 조선인의 입장에서 듣고 보고하는 내용인데도 조선을 모시겠다 같은 의미는 없고, 거의 대등한 관계에 가깝다. 그래도 조선 백성 쇄환의 대가로 재물보다는 벼슬을 달라고 하긴 했다. 그러나 이것도 조선을 부모의 나라로 섬겨서라고 보긴 힘든 게, 그 요청을 들은 신충일부터 중국 및 우리 나라와 더불어 우호를 맺는 것을 호인에게 과시하여 모든 부락을 위복(威服)하고자 하는 것 같다고 하였으니, 아직 명나라와 맞짱 뜨기는 이른 시점에서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하기 위한 외교 정치적 조치라는 게 더 타당하다.

신충일의 보고를 들은 선조는 그야말로 북로남왜의 위협에 처한 것을 걱정하고 북쪽 여진족을 경게한다. 누르하치의 파병 요청을 거절했다고  선조를 가는 사람보다는 선조의 판단이 적어도 여진족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정확하다. 이 일련의 과정을 통하여 건주위를 중심으로 한 여진족이 장차 큰 위협이 되는 걸 파악할 수 있었다. 훗날 광해군의 중립외교에 대한 판단 근거도 선조 때 모은 정보에서 시작할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정보 모으고 분석도 나름 제대로 했지만, 결과가 병자호란이라 묻히고 선조는 왜란에 대한 실책이 더 부각되어 까이는 거지만, 적어도 이 문제만 보자면 선조의 판단이 옳았고, 남쪽 때문에 대응에 한계가 있지만 그나마 그 사황에서는 할 만한 일을 했다. 

훗날 1598년 누르하치는 또 한 번 파병 제안을 하지만 역시 명을 통해서고, 조선은 거절하였다. 이미 실체도 확인한 마당에 처음에도 거부한 제안을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누르하치가 임진왜란 시 파병하겠다고 한 건 조선의 부모의 나라라서가 아니라 동아시아에서의 입지 구축을 위한 거였고, 설령 파병이 성사됐다고 해도 공짜는 아니었을 거다. 조선이 거부한 것도 사대주의에 쩔어서가 아니라 아무리 급해도 위협적인 여진족에게 국경을 개방하는 건 큰 부담이어서다.

똑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21세기 한국인들이 이해하기 쉽게 비유하자면, 2차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한미상호방위조약에 의거해 미군 참전. 여기에 일본이 백악관이나 팬타곤으로 자위대를 참전시키고 싶다는 의사를 타진했다는 사실을 한국 정부가 전달받은 거랑 비슷하다. 천황은 백제의 후손이라는 말 좋아하니, 대충 비슷해 보이는데....여기에 찬성할 한국인은 얼마나 될까? 여기에도 찬성한다면 누르하치의 파병을 거절한 조선을 까도 더 말 안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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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초록불 2011/10/30 17:01 #

    이자성을 몰아내달라고 청병에게 산해관을 연 뒤에 어찌 되었던가를 보면 뭐 뻔한 이야기 아니겠어요?
  • 을파소 2011/10/30 22:37 #

    저 무렵이면 아직 나라를 접수하긴 이르다고 판단해 먹진 않을 거 같지만, 말그대로 아직 때가 아닐 뿐이지 선의로 그러진 않을 테죠. 그 외 다른 면에서 대가는 받아낼 거고요.
  • 행인1 2011/10/30 17:46 #

    누르하치는 진작부터 명과 조선의 주목을 받는 걱정거리였군요. 잘 읽고 갑니다.
  • 객관적진리추구 2011/10/30 20:19 #

    저도 한명기 교수책하고 인강듣고 알았답니다 여기서 더 자세히 알고가네용^^
  • 을파소 2011/10/30 22:37 #

    하룻아침에 떠오른 건 아니니까요.
  • 明智光秀 2011/10/30 19:26 #

    마지막부분에서 간단명료하네요. ^^
  • 객관적진리추구 2011/10/30 20:20 #

    오 저도 공감!ㅋ
  • 을파소 2011/10/30 22:38 #

    생각해보니 길게 포스팅 할필요 없이 마지막 문단으로 정리가 되는 것도 같습니다.(...)
  • 진성당거사 2011/10/30 19:54 #

    잘 읽었습니다. 국제관계는 언제나 냉혹한 법인거 같아요.
  • 을파소 2011/10/30 22:39 #

    조약을 맺어도 뒷통수 때린 일이 비일비재한데, 그런 것도 없는 사이를 쉽게 믿을 수 있을 리 없죠.
  • 객관적진리추구 2011/10/30 20:21 #

    오늘도 좋은 정보 얻고갑니다^^ 여진족은 조선에 있어 무좀같은 존재라는...ㅠㅠㅋㅋㅋ
  • 을파소 2011/10/30 22:40 #

    무좀보다 좀 크죠. 종기 정도로는 잡아줘야...
  • 2011/10/31 13:48 # 삭제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누군가의친구 2011/11/01 16:30 #

    하긴 국제관계는 참...(...) 특히나 전쟁중인 상황에서 국경을 통제해야 하는 조선으로써는 여진족때문에 고심이 많았을 겁니다.
  • 곡차 2013/09/18 08:49 # 삭제

    선조때는 임란이 끝난후에 백두산 동쪽의 여진족을 징벌하여 공격하기도 합니다. 두번을 출격하죠.
    왜란으로 조선이 혼란하고 건주위에 흡수된후 노토부락 여진족들이 조선을 깔보고 국경을 약탈하고 백성들을 잡아가는 일이 많아지자 계속 참으면 조선을 더욱 업신여겨 더욱 기승을 부릴거라 생각해서 결국 노토부락 1000여호를 완전히 마을부터 식량까지 없애버립니다. 이때도 누루하치한테 보고가 올라갔을겁니다. 최종적으로 단지 아직은 국력이 모잘라서인지 모른척하고 있죠. 이에 조선군은 한번 더 출격해서 다시 여진부락 몇개를 부수고 잡혀간 조선인 일부를 구해오죠. 근대 조선기록을보면 쳐들어오는 조선군을 보고 기가막히게 산으로 튀어서 여진인들 자체는 별로 죽이지 못한걸로 나옵니다. 근대 번족들(아직조선에신속한부족)을 통해서 올라온 내용에는 이때 토벌로 노토여진 1만명이 죽었다고 하는데 아마 급하게 도망가느라고 아무것도 챙기지 못한 상태라서 식량도 없고 마을까지 없애버린상태 였고 다시 조선국경을 약탈도 못하므로 다른이유로 많이 죽었지 않나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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