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과 여진족(2) 이순신/임진왜란

 문명5에서 한국DLC를 받아 임진왜란을 모델로 한 시나리오를 플레이하면 누르하치가 함경도 방면에어 얼정거린다. 엄밀히 말하자면 완전 없던 애기는 아니다. 물론 누르하치가 그런 건 아니고 그 때 바로 조선과 명나라의 영토를 노릴 수준도 아니며 노략질 수준에 불과하므로 게임은 역시 게임 밸런스를 위해 후금 건국 이후의 스펙을 끌어온 거지만. '과장이 많다'를 의식한다면, 아주 틀린 얘기인 것만도 아니라는 거.

 가토가 함경도까지 치고 올라갔을 때, 말이나 갑옷 투구를 보내준 부족도 있엇지만 반대로 함경도 일대에서 약탈을 한 여진족도 있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1593년에도 조선 조정은 '적이 후퇴한 후이니 마땅히 문죄해야 하지만, 우리는 지금 병력이 부족하니 차라리 참고 그들을 무마해야 합니다.'라고 말할 정도로 사정은 열악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경원(慶原)의 추장 오라치(吾羅赤) 등이 다른 여진족들을 타일러 항복시키고 무마를 하였기에 조선 정부는 오라치에게 상을 내리고 항복을 받아들이고 하면서 체면은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모두 손을 잡고 "우리 모두 함께 화합하며 살아요. 하하하"로 결론 내려지면 국경엔 진작에 평화가 정착했을 터. 당연히 무작정 함경도가 평온할 수만은 없었다. 다시 이듬해인 1594년. 임진왜란은 소강상태로 접어들었지만 여전히 경상도 남부 일대에 적군이 자리잡아 있는 시점에서 여진족은 또 함경도에서 난리친다.

 4월 4일 보고된 함경도 관찰사 윤탁연의 장계에 따르면 여진족의 공격으로 함경도 감파보가 함락되었다. 여진족은 공격을 하면서 성을 포위하고, 부대를 둘로 나눠 일시에 돌격을 하면서 함락, 그리고 여진족인 민가에 불을 지르고 백성들은 도망가고 하는 난리가 났다.   


 비변사에서 분석한 문제점은 전부 여진족이 사악하기 때문만은 아니라 지방 관리들이 탐학하면서 인심을 잃은 것에 있으니 탐관오리는 처리하고, 청렴하고 근신하여 백성은 물론 여진으로 부터도 인심을 얻은 관리를 부임시키는 등 민심을 수습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와는 별도로 군비 강화도 필요하므로 항왜를 북방으로 배치시키는 것도 진행되었고.

 이렇게 조선 정부도 나름 노력하지만 이듬해인 1594년에도 여진족은 함경도에서 침범을 한다. 

함경도 병마절도사 정현룡(鄭見龍)의 보고에 따르면, ‘강 위아래에서 사는 오랑캐 이라대(伊羅大) 등이 전에 영건보(永建堡)·미전보(美錢堡) 등을 두 차례나 포위하였다가 불리하게 된 후로는 분노를 이기지 못하여 심처(深處)의 우지개(亐知介) 등에게 청병(請兵)하여 여러 곳에 둔취(屯聚)하고 수시로 출몰한다. 강포한 형세를 떨쳐 석권해 올 환난이 조석(朝夕)으로 염려된다. 북쪽 고을 각색(各色) 군사는 현재 독촉(督促)하여 들여보내고 남쪽 고을 군사는 이미 짐을 꾸리게 하였으니, 변란이 일어났다고 듣는 즉시 영솔하여 올 것이다.’ (<선조실록> 1594년 9월 28일)라고 하였다. 


이라대의 심복인 거추(巨酋) 역수(易水)는 그들이 사는 부락 북쪽에 석봉(石峯)이 솟은 곳에 성을 쌓았는데, 인근 여진 부족 중에서도 제법 강하여 다른 부족의 포위 공격에도 함락되지 않고 오히려 상대를 패퇴시켰다. 그래서 그들은 기고만장해졌지만, 이탕개가 토벌된 후로 조선에 대해 함부로 굴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결국 기회가 찾아왔으니 바로 임진왜란. 이 틈을 타서 이라대 부족도 조선의 변경을 노렸으나, 정현룡에 따르면 이 때만 해도 조선군 병력도 당당하여 함부로 침범하진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전쟁 발발 이듬해인 계사년에 기근과 전염병의 영향에 반적(叛賊)(정확히 누굴 가르키는 지는 확실치 않음)의 잔당이 난동을 부린 틈을 타서 역수는 어라대는 물론 홀자온(忽刺溫)까지 연결하여 여진족을 규합하고, 약탈을 하면서 건보(永健堡)와 미전진(美錢鎭)의 성까지 포위하기도 했다. 당연히 약탈도 약탈이지만 그 영향으로 농민이 농사도 짓기 힘들고, 기껏 기른 곡식도 수확하지 못한 사례가 빈번했으니 그 피해는 클 수 밖에 없었다.


 함경도의 방위를 챔익져야할 정현룡은 순찰사 이희득(李希得)과 함게 여진족을 격멸하려 했지면 지형의 험난함으로 쉽진 않았다. 다행히 경원 인근에서 여진족 부락을 공격하여 조선군의 사기는 어느 정도 올릴 순  있었다. 그 후 정현룡은 군사 1,325명, 항왜 25명을 종성에 집결시킨 뒤 이들을 진격시켜 역수의 부락을 일시에 포위한다. 역수는 여자와 노약자는 대피시키고, 장정은 모아 서을으 들어가 굳게 수비하면서 버티기에 들어갔다. 조선군은 불을 지르고 굴 아래를 파는 한편, 항왜를 시켜 성 아래로 들어가도록 독려한 후 조선군이 따르게 하였다. 

역수는 그래도 순순히 항복할 생각은 없었다. ‘홀자온에 청병(請兵)을 한 지 이미 5일이 되었으니 너희와의 혈전(血戰)을 그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구경이나 하겠다.’라면서 욕지거리로 떠들면서 꿋꿋이 버티려 했다. 성에서도 완강히 저항하여 공격이 쉽지 않아 성벽을 뚫다가 군사들을 퇴각시켜야 했다. 

그러나 그거 좀 막았다고 성 안의 여진족은 제대로 방심한 모양. 성 안에서 피리 소리 북소리가 들리고 노래 부르는 소리도 들리는데, 내부 기강이 해이해진 것으로 보고 다시 공격. 여진족도 저항하였지만 조선군은 장수들이 칼을 빼어들고 독전하고, 명을 따르지 않는 자 하나를 목 베어 군중에 돌리니 조선군은 앞다투어 진격하여 성의 돌을 뽑아내 한 식경만에 깨뜨렸다. 그리고 성을 넘어 진격하니 적을 섬멸하여 취한 수급이 266. 조선군의 전사자는 없었다. 

이 전투에 승리한 후에도 다른 부락의 추장 투정내(投丁乃)도 일부 병력을 보내 골격장(鶻擊將) 정시룡(鄭時龍)을 시켜 토벌하였다.  (<선조실록> 1594년 10월 11일) 

이 보고를 받은 후 비변사에서는 정현룡의 공을 높이 평가하고, 다만 승리를 거둔 후 군사들이 적을 가볍게 여겨 기강이 해이해졋다가 환란을 당할 수 있다고 염려하고, 다른 부족들이 선동당해 나설 수도 있는 점을 우려하였다 그래서‘역수(易水) 등의 여러 부락이 나라의 큰 은혜를 저버리고 지은 죄악이 컸으므로 출병하여 죄를 물어 천토(天討)를 시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나머지 무고한 번호(藩胡)로서 우리 나라에 붙좇는 자는 은혜를 더하여 줄 것이니 의구(疑懼)하지 말라.’는 뜻을 효유하고 지방 관리의 비리는 엄단할 것을 건의하고, 선조도 이 뜻을 따랐다.

공을 세운 정현룡은 가자하는 등 포상을 받는다. 그런데 <연려실기술> 등 일부 기록에 따르자면 임진년에 정현룡은 종성부사로 있으면서 일본군이 함경도까지 쳐들어오자, 항복하려고 표문을 적으면서 "나를 위무해 주면 임금이며 나를 학대하면 원수이니, 누구를 부린들 신하가 아니며 누구를 섬긴들 임금이 아니랴."라고 하면서 판관 임순과 항복하려고 했으나 임순이 그 글을 던지고 달아났다고 한다. 이게 사실이면 조선시대에 이런 글을 썼다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죽거나, 두고 두고 문제가 될 법한데, 공식적으로 별 이야기는 없었다. 아예 없었던 이야기가 아니라면, 임진년에 결국 정문부와 합세하여 가토군과 싸우고 그 뒤 여진족을 대상으로 전공을 세운 것으로 만회를 하여 넘어갔거나 했을 터.

 역수의 토벌로 정현룡의 함경도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커졌지만, 얼마 후 그는 중풍에 걸리고, 선조는 약재와 의원까지 보내준다.별 정현룡이 병들자 비변사에서는 '여진족이 반드시 또 다른 마음을 낼 것이니 이것이 바로 조석의 근심'이라고 할 정도의 위치였기에 선조로서도 잘 대우해주는 게 당연했지만그런데 남해에서 자리를 비우면 왜적이 반드시 또 다른 마음을 내어 조석의 우환이 될 장군에겐 왜 그랬을까?  차도는 없어 정현룡은 전신불수로 말도 제대로 못할 지경에 이른다. 

 어쨌거나 여진족은 누르하치의 건주위가 그런 건 아니지만 임진왜란 중 변경을 놀리 정도였으니 그리 조선을 공경했다곤 보기 힘들다. 누르하치도 그런 전란을 틈탄 변경 노략질은 장차 꿈꾸는 원대한 포부에 비하면 당장의 이득을 취하느라 이미지 깍아먹는 일이라 하지 않았을 것이지 조선을 공경하여 그랫다고 보기도 힘들고. 애당초 조선 초기엔 조선의 정벌 대상이던 건주위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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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아르니엘 2011/10/18 08:11 #

    음, 임진년때 저런 글을 적은 사실이 있었다면, 과연 지은 죄가 있어서라도 '공을 세워서 죄를 씻으려는' 분투를 하지 않을 수가 없겠네요. 조정에서도 남쪽에서 정신이 없는데 북쪽이라도 좀 평정이 되어야 '그나마 좀 좋은 소식을 들어서' 얼굴에 화기가 돌아오실테고. ...그 마음씀씀이를 좀 남쪽에서 분투하시는 장군님에게도 돌리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ㅠ.ㅠ
  • 을파소 2011/10/18 23:23 #

    그런데 조선이란 나라는 공을 세워도 저런 행적이 있으면 두고두고 씹힐만 한데 그런 게 없으니 정말 있었던 일인진 좀 더 신중히 따져야 할 것 같습니다.
  • 킨키 2011/10/18 09:18 #

    그런데 남해에서 자리를 비우면 왜적이 반드시 또 다른 마음을 내어 조석의 우완이 될 장군에겐 왜 그랬을까요?

    이 부분이 정말 ㅠㅠ
  • 을파소 2011/10/18 23:23 #

    이렇게 보니 그 부분에 오타가 있어 수정 했습니다.(...)
  • 까마귀옹 2011/10/18 10:55 #

    1. 이미 알고 있으시겠지만 Q들 중에선 누르하치의 그 편지를 가지고 '여진족도 한민족이라능!'이란 개드립을 치지요.

    2. 전쟁으로 치안-국경 방위선이 무너지면 그 다음은 당연히 주변 세력의 신나는 '상호 협의 없는 권익 추구'(라고 쓰고 노략질이라고 읽는다)이지요.

    3. "주상 전하께선 절대 그러실 분이 아닙니다! 하지만 극악무도한 소설을 써보자면...(이하 생략)"
  • 을파소 2011/10/18 23:25 #

    1. 그런 개드립도 이 포스팅을 쓴 이유 중 하나기도 합니다.
    2. 유사상황이 지옥급으로 펼쳐지는 곳이 지금의 소말리아죠.(...) 내분에 가깝긴 하지만요.
    3. 생략하지 마시고 써보세요.(응?)
  • hyjoon 2011/10/18 11:48 #

    그리고 속이 안좋은 분에게는 고기를 보냈습니다. (응?)
  • 을파소 2011/10/18 23:25 #

    고기는 소화가 잘 되서...(퍽)
  • 객관적진리추구 2011/10/18 12:44 #

    여진족하니 귀가 쫑긋 말초신경은 아~(먼산)ㅋㅋㅋ
  • 을파소 2011/10/18 23:25 #

    북방민족은 다 우리 민족이라기도 하죠.
  • arsakes 2011/10/18 13:05 # 삭제

    정문부의 조상이 알고보면 정종이고 상대적으로 낮은 관원임에도 정문부가 추대된 것은 "정종"의 명성이 당시 이미 조선천지에 확립되어 있었던 것도 크게 작용한 것이라고도 하더군요
  • 을파소 2011/10/18 23:28 #

    조정에서 정문부는 남의 힘으로 공을 이룬 것이라는 얘기를 한 적도 있긴 합니다. 실은 정현룡의 공이라고도 말했고요.

    그렇게 말한 분 중에 선조님하도 끼는군요.(비슷한 광경을 본 거 같은데...)
  • Fedaykin 2011/10/18 21:22 #

    적을 섬멸하여 취한 수급이 266. 조선군의 전사자는 없었다.


    응? 뭔가 이상하다?! 우리가 알던 조선군이 아니야! ㄷㄷㄷ
    역시 조상님들은 할 때는 하는군요.
  • 을파소 2011/10/18 23:31 #

    용인전투의 병사들이 이치전투나 행주대첩에서 권율의 지휘로 승리를 하였고, 수군은 통제사가 이순신이냐 원균이냐에 따라 극과극을 보여준 바 있는 조선군이니까요.

    할 때는 리얼리티 형편 없는 먼치킨 픽션인 마냥 엄청 하는데, 못 할 땐 개그 수준으로 못한 사례가 있는 게 조선군입니다.(...)
  • 허안 2011/10/19 10:49 #

    그거 어쩐지 지금도 해당하는 것 같음.
  • 암호 2011/10/19 19:53 #

    극과 극을 달립니다.
  • 누군가의친구 2011/10/19 23:58 #

    역시 지휘관의 자질하나에 승패가 다르군요. 그나마 북방이 크게 무너지지 않아서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으면...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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