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06월 30일
김조순, 세도정치를 열다(5)
지난 번에 순조가 세도정치를 막을 힘도 의지도 없다고 했는데, 정확히 말하자면 의지가 없었다고 하긴 힘들다. 힘이 없는 건 변하지 않지만, 그라고 아무리 조선이 신권이 강한 나라라지만, 처가에 휘둘리는 왕으로 남는 걸 좋아하진 않았다. 그래도 한 가지 믿는 구석은 남아있었으니 그건 그의 아들, 효명세자(孝明世子)였다.
효명세자는 1809년(순조 9년) 순조의 장남으로 태어나서 1812년에 세자로 책봉되었다. 학문을 좋아하여 젊은 나이에 경헌집(敬軒集), 학석집(鶴石集) 등의 문집을 남겼고 무용에도 관심이 많아 고구려무, 향려무 등을 집대성 하였다.
효명세자는 1827년 2월 18일에 대리청정을 시작한다. 그리고 불과 나흘만에 태묘(太廟)에 전배(展拜)할 때 실수를 하였다는 이유로 안동김씨인 이조판서 김이교(金履喬), 그리고 그 지지세력인 이희갑(李羲甲)과 김재창(金在昌)을 월봉 2등(越俸二等)하도록 한다. 요즘 말로 말하자면 감봉이다.
또한 세자의 스승이었으며 추사 김정희의 아버지인 김노경(金魯敬), 김로, 이인보 등의 측근을 중용하고, 그간 권력에서 소외된 소론, 남인 북인 들을 등용한다.
그런 그를 처가인 풍양조씨가 지원하였다. 효명세자의 처삼촌 조인영(趙寅永)은 규장각과 홍문관의 요직을 장악하고, 장인 조만영((趙萬永)은 대리청정 직후 훈련대장에 임명된다. 규장각 출신이면서 군부의 요직을 두루 거친 순조의 장인 김조순과 비슷하다. 처가의 힘을 빌어 외가를 견제하는 모양새지만, 그렇다고 아버지 순조처럼 휘둘리는 건 아니었다.
그리고 대리청정 시작 2년 하고도 5개월 후인 1829년 7월 20일, 부호군(副護軍) 심영석(沈英錫)이 상소를 한 장 올린다. 그 내용은 당시 호조판서였으며 김조순의 조카인 김교근(金敎根)과 그 아들 김병조(金炳朝)를 부패했다는 죄목으로 탄핵하는 것이었다.
이 상소에서 심영석은 김교근에 대해서는 '곧 하나의 경교(傾巧)·비패(鄙悖)하고 품행이 전몰(全沒)한 부류'라고 칭하고, 김병조는 '하나의 엄세번(嚴世蕃)에 불과할 따름'이라고 말한다. 엄세번은 명나라의 유명한 간신 엄숭(嚴嵩)의 아들이니, 김교근이 엄숭에 비할만한 간신이라는 뜻도 된다.
현대 검찰도 부자를 동시에 구속하는 건 너무하다는 시선을 의식해서 어지간히 큰 죄가 아니면 둘 중 하나만 구속시키는데, 저 시대에 한 상소에서 부자를 동시에 탄핵한 건 사람의 도리로 어찌 할 수 있냐는 소리를 들어가며 심영석은 유배당한다. 하지만 심영석의 상소는 신호탄에 불과하였다.
곧 이어서 양사가 김교근 부자를 탄핵하고, 홍문관 부교리도 여기에 동참한다. 결국 김교근은 황해도 옹진으로 유배당한다. 얼마 안 되서 풀려나긴 하였다. 이를 보면 효명세자도 안동김씨가 외가인만큼 완전히 축출할 생각은 아니었던 거 같다. 김교근을 유배보내고 한 달도 안 되서 풀어준 것만 봐도 그렇다. 하지만 이걸로도 안동김씨로서는 권력기반에 불안을 느낄 일이었다. 온전히 돔점하던 권력을 잃거나 최소한 나눠가져할지도 모르는 상황이 됐으니까.
하지만 그 불안은 오래가지 않았다. 1830년 5월 6일, 효명세자가 22세의 나이로 급서하면서 안동김씨의 기반을 흔들 구심점도 사라졌기 때문이다. 효명세자의 측근들은 밀려나고, 김교근은 직첩을 돌려받았다. 다만 효명세자가 죽은 지 몇 달 후에도 여전히 양사가 그를 가중처벌하라고 주장하고, 이들 부자가 그 후 3년이 지나서야 직첩을 돌려받은 걸 보면, 세자 사후 바로 복권 시켜주기에는 지은 죄가 확실했던 모양이다.
효명세자는 아들 헌종이 즉위한 후 익종(翼宗)으로 추존되고, 나중에 양자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문조익황제(文祖翼皇帝)로 추존되지만, 나중 일이다. 효명세자비는 졸지에 남편을 잃고 청상이 되었고, 헌종 즉위하고 잠시 친정 풍양조씨가 득세하기도 했지만, 정국은 다시 안동김씨가 주도한다. 하지만 이 여인이 훗날 안동김씨 세도정치를 종식시키는 중요한 선택권을 가지게 될 거라고는 이 때는 아무도 예상치 못 했을 것이다.
어쨌거나 효명세자의 죽음으로 안동김씨는 다시 권력을 장악한다. 하지만 그 수장 김조순은 그걸 누린 기간이 길지 않았도. 그도 외손자가 죽은 지 2년 후인 1832년에 6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순조는 장인의 죽음에 슬퍼하며 장례에 예우를 아끼지 않았고, 정조 묘정에 추배하였다.
실록은 그를 '용의(容儀)가 뛰어나게 아름답고 기국(器局)과 식견이 넓고 통달하여 어릴 때부터 이미 우뚝하게 세속(世俗) 밖에 뛰어났으며, 젊어서 과거에 급제하고는 오랫동안 가까이 모시는 반열에 있으면서 공평하고 정직하여 숨김이 없다'고 평하였다. 사실 그런 평을 들어도 될만큼 학식 깊고 인품이 있는 인물인 건 사실이었다. 물론 <순조실록>에 그를 폄하하는 기록이 잘 실리지 않을 것임은 감안해야겠지만, 그걸 생각하더라도 김조순이 단순한 간신이 아닌 건 분명하다.
그러나 그 자신은 정도를 지킨다 할지라도 자손들은 세도정치로 나라를 병들게 하였다. 고증 즉위로 권력을 잃은 후에는 다시 민시들이 세도정치를 답습하여 망국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여흥민씨보다 안동김씨가 그나마 양반인 편이긴 하지만, 그렇다 해도 김조순은 자신의 가문을 권력의 중심에 올려놓아서 충신이나 명신으로 남을 수 있는 학식과 인품을 가지고도 세도정치를 시작한 장본인이라는 오명으로 기억에 남게 됐고, 그 가문도 숱한 충신을 배출한 명문가로 보다는 나라 망친 가문으로 기억하는 사람이 더 많아졌으니, 이게 다 업보인건가?
효명세자는 1809년(순조 9년) 순조의 장남으로 태어나서 1812년에 세자로 책봉되었다. 학문을 좋아하여 젊은 나이에 경헌집(敬軒集), 학석집(鶴石集) 등의 문집을 남겼고 무용에도 관심이 많아 고구려무, 향려무 등을 집대성 하였다.
효명세자는 1827년 2월 18일에 대리청정을 시작한다. 그리고 불과 나흘만에 태묘(太廟)에 전배(展拜)할 때 실수를 하였다는 이유로 안동김씨인 이조판서 김이교(金履喬), 그리고 그 지지세력인 이희갑(李羲甲)과 김재창(金在昌)을 월봉 2등(越俸二等)하도록 한다. 요즘 말로 말하자면 감봉이다.
또한 세자의 스승이었으며 추사 김정희의 아버지인 김노경(金魯敬), 김로, 이인보 등의 측근을 중용하고, 그간 권력에서 소외된 소론, 남인 북인 들을 등용한다.
그런 그를 처가인 풍양조씨가 지원하였다. 효명세자의 처삼촌 조인영(趙寅永)은 규장각과 홍문관의 요직을 장악하고, 장인 조만영((趙萬永)은 대리청정 직후 훈련대장에 임명된다. 규장각 출신이면서 군부의 요직을 두루 거친 순조의 장인 김조순과 비슷하다. 처가의 힘을 빌어 외가를 견제하는 모양새지만, 그렇다고 아버지 순조처럼 휘둘리는 건 아니었다.
그리고 대리청정 시작 2년 하고도 5개월 후인 1829년 7월 20일, 부호군(副護軍) 심영석(沈英錫)이 상소를 한 장 올린다. 그 내용은 당시 호조판서였으며 김조순의 조카인 김교근(金敎根)과 그 아들 김병조(金炳朝)를 부패했다는 죄목으로 탄핵하는 것이었다.
이 상소에서 심영석은 김교근에 대해서는 '곧 하나의 경교(傾巧)·비패(鄙悖)하고 품행이 전몰(全沒)한 부류'라고 칭하고, 김병조는 '하나의 엄세번(嚴世蕃)에 불과할 따름'이라고 말한다. 엄세번은 명나라의 유명한 간신 엄숭(嚴嵩)의 아들이니, 김교근이 엄숭에 비할만한 간신이라는 뜻도 된다.
현대 검찰도 부자를 동시에 구속하는 건 너무하다는 시선을 의식해서 어지간히 큰 죄가 아니면 둘 중 하나만 구속시키는데, 저 시대에 한 상소에서 부자를 동시에 탄핵한 건 사람의 도리로 어찌 할 수 있냐는 소리를 들어가며 심영석은 유배당한다. 하지만 심영석의 상소는 신호탄에 불과하였다.
곧 이어서 양사가 김교근 부자를 탄핵하고, 홍문관 부교리도 여기에 동참한다. 결국 김교근은 황해도 옹진으로 유배당한다. 얼마 안 되서 풀려나긴 하였다. 이를 보면 효명세자도 안동김씨가 외가인만큼 완전히 축출할 생각은 아니었던 거 같다. 김교근을 유배보내고 한 달도 안 되서 풀어준 것만 봐도 그렇다. 하지만 이걸로도 안동김씨로서는 권력기반에 불안을 느낄 일이었다. 온전히 돔점하던 권력을 잃거나 최소한 나눠가져할지도 모르는 상황이 됐으니까.
하지만 그 불안은 오래가지 않았다. 1830년 5월 6일, 효명세자가 22세의 나이로 급서하면서 안동김씨의 기반을 흔들 구심점도 사라졌기 때문이다. 효명세자의 측근들은 밀려나고, 김교근은 직첩을 돌려받았다. 다만 효명세자가 죽은 지 몇 달 후에도 여전히 양사가 그를 가중처벌하라고 주장하고, 이들 부자가 그 후 3년이 지나서야 직첩을 돌려받은 걸 보면, 세자 사후 바로 복권 시켜주기에는 지은 죄가 확실했던 모양이다.
효명세자는 아들 헌종이 즉위한 후 익종(翼宗)으로 추존되고, 나중에 양자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문조익황제(文祖翼皇帝)로 추존되지만, 나중 일이다. 효명세자비는 졸지에 남편을 잃고 청상이 되었고, 헌종 즉위하고 잠시 친정 풍양조씨가 득세하기도 했지만, 정국은 다시 안동김씨가 주도한다. 하지만 이 여인이 훗날 안동김씨 세도정치를 종식시키는 중요한 선택권을 가지게 될 거라고는 이 때는 아무도 예상치 못 했을 것이다.
어쨌거나 효명세자의 죽음으로 안동김씨는 다시 권력을 장악한다. 하지만 그 수장 김조순은 그걸 누린 기간이 길지 않았도. 그도 외손자가 죽은 지 2년 후인 1832년에 6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순조는 장인의 죽음에 슬퍼하며 장례에 예우를 아끼지 않았고, 정조 묘정에 추배하였다.
실록은 그를 '용의(容儀)가 뛰어나게 아름답고 기국(器局)과 식견이 넓고 통달하여 어릴 때부터 이미 우뚝하게 세속(世俗) 밖에 뛰어났으며, 젊어서 과거에 급제하고는 오랫동안 가까이 모시는 반열에 있으면서 공평하고 정직하여 숨김이 없다'고 평하였다. 사실 그런 평을 들어도 될만큼 학식 깊고 인품이 있는 인물인 건 사실이었다. 물론 <순조실록>에 그를 폄하하는 기록이 잘 실리지 않을 것임은 감안해야겠지만, 그걸 생각하더라도 김조순이 단순한 간신이 아닌 건 분명하다.
그러나 그 자신은 정도를 지킨다 할지라도 자손들은 세도정치로 나라를 병들게 하였다. 고증 즉위로 권력을 잃은 후에는 다시 민시들이 세도정치를 답습하여 망국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여흥민씨보다 안동김씨가 그나마 양반인 편이긴 하지만, 그렇다 해도 김조순은 자신의 가문을 권력의 중심에 올려놓아서 충신이나 명신으로 남을 수 있는 학식과 인품을 가지고도 세도정치를 시작한 장본인이라는 오명으로 기억에 남게 됐고, 그 가문도 숱한 충신을 배출한 명문가로 보다는 나라 망친 가문으로 기억하는 사람이 더 많아졌으니, 이게 다 업보인건가?
# by | 2009/06/30 23:29 | 을파소의 역사이야기 | 트랙백 | 덧글(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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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로 인해 김조순은 씻을 수 없는 오명을 뒤집어 쓴 거라 생각되네요. 김조순의 의도야 어쨌든 그가 만들어놓은 기반으로 인해 안동 김씨가 세도정치를 했고 그 세도정치로 인해 조선이 막장으로 흘러갔으니까요. 김조순도 책임을 완전히 피할 순 없겠죠. 쩝......
서형수는 소론임에도 벽파가 몰락하는 그 시점(김달순 사건)에 연루되어 장기간 유배를 당하는데, 그가 연루되었던 이유가 뭔지 혹시 아시는지??
효명세자는 죽은 과정이 정조와 비슷했다고 하더군요
효명세자가 장수까지 아니어도 평균만 살았어도 세도 정치 폐해가
줄어들엇을지 모르겠군요
自重自愛, paro1923, 我行行/엄친아는 독살당하는 거죠.(맞는다)
R쟈쟈/나합 덕에 세도정치가 더 막장으로 보이면서 김조순까지 욕먹는 면도 있을 겁니다.
rumic71/그러게 세도정치까지만 안 갔으면 나름 멋있었을 양반인데 말이죠.
어릿광대/그럴 수 밖에 없긴 하죠.
paro1923/본인은 청렴해도 주변은 부패하는 경우 많죠.
아롱쿠스/서형수는 홍계희 등과 엮여 탄핵을 받고 결국 유배당했군요. 자세한 건 저도 찾아봐야겠습니다.
소시민, 위장효과/효명세자는 죽었어. 더는 없어.
하지만! 내 등에! 이 가슴에! 하나가 되어 계속 살아가!
...장김돌파 흥선라간!(맞는다)
라라/이조판서 맞습니다.
효명세자가 오래 살았으면 세도정치가 완화됐을 수는 있죠. 조선의 운명을 바꿀 정도인지는 미지수지만요.
asianote/한참 내부가 막장으로 갈 때 이웃은 한참 잘 나가기 시작했다는 게 문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