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방명록

2017년 시작한지 보름이 되고야 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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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위키발 선덕여왕 암군설 잡상 을파소의 역사이야기

요즘 웹에서의 선덕여왕 평가에 대한 간단 잡상

조금만 더 자세히 얘기해 보죠.

1. 일단 근래 웹에서 선덕여왕 암군설의 출처가 나무위키가 유력한 건, '선덕여왕 암군'으로 구글과 네이버 검색을 하면 거의 2016년 10월 이후란 말이죠. 2016년 10월 최순실 게이트가 터지기 직전에 나무위키의 선덕여왕 항목은 암군이라는 주장으로 대거 수정된바, 웹에서의 인식은 이 영향을 받은 건 확실해 보입니다.

선덕여왕이 실제 보돠 과장되어 평가 받는다, 정도였다면 문제 삼을 정도는 아닏 무슨 선덕여왕이 한국사 암군 워스트 5에 든다, 나라가 망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비담의 난에 백성도 대거 가담하여 기세가 높았다 등등의 소리가 나올 정도라 문명6에 선덕여왕이 추가된다니 희대의 암군이 나온다고 분노하는, 대체 영문을 모를 분노가 나오고 있습니다.


이 항목의 부정 평가는 긍정 평가는 추측에 의거 한다고 단언합니다. 그러면 부정 평가는 사료에 입각한 거 같지만, 사실 이것도 추측에 의거하긴 마찬가지죠. 논문 출처를 제시한 것도 입맛에 맞는 거만 고른 게 많고요.

“한편 이 해(641) 3월에 百濟에선 義慈王이 卽位하였다. 이어 11월에는 큰 규모의 政變이 있었고, 이를 통해 의자왕은 王權 强化를 도모하였다. 나아가 이듬해인 642년 여름 신라를 공격하여 大耶城 등 40여 성을 빼앗았다. 10월에는 高句麗에서 大規模 流血政變을 통해 淵蓋蘇文이 執權하였다. 이 해 末, 百濟의 攻擊을 받아 窮地에 처한 新羅에서는 金春秋가 平壤行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淵蓋蘇文과 金春秋의 평양성 談判은 無爲로 끝났다. 신라의 평화 제의를 연개소문이 거부하였던 것이다.”
“당의 東進이 沮止된 상황에서 신라는 高句麗와 百濟의 挾攻에 시달리는 형편이었으며, 百濟와 連結된 倭의 動向도 憂慮의 對象이었다. 아울러 신라 내부에선 645년 전쟁에 직접 참전하였다가 실패로 끝난 정책에 대한 책임을 둘러싸고 논란이 조정 내에서 있었던 것 같다.”
“선덕여왕 14년(645) 11월 水品을 교체하여 비담을 상대등으로 삼은 것은 이 해 5월에 행한 고구려 공격의 실패에 대한 귀족층들의 반발을 수습하기 위한 대책이었다고 여겨진다.”
“이처럼 안팎의 난제가 중첩된 상황에서 647년 正初, 首都에서 ‘女主不能善理’를 내세운 毘曇의 亂이 勃發하였다.”
노태돈, 古代 東아시아 國際秩序의 再編과 韓日關係 (2010)

노태돈 교수의 이 논문이 선덕여왕이 암군이라는 주장이라고 수정자가 제시했지만, 이건 당시 상황이 위기였단 주장은 맞지만 그게 선덕여왕이 암군이라는 주장으로 등치되진 않습니다.

의자왕 즉위 후 백제의 공격에 40여 성 상실, 그 후 대야성 상실 등 영토를 잃은 걸 암군의 증거라고 제시하고, 여기에 다른 웹상의 글들은 진흥왕 진평왕이 일군 기반을 선덕여왕이 말아 먹었다, 그러니 암군이라 비판도 하더군요.

그런데 말입니다. 신라가 위기였던 건 맞는데 그건 백제, 고구려가 모두 적이고 왜도 우호적이지 않으니 생긴 일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된 이유는, 진흥왕 때 고구려가 점유하던 한강 유역을 점령하면서 동맹국이었던 백제의 뒤통수를 치고 성왕까지 전사시켰으니 두 나라 다 적이 된 겁니다. 왜는 백제와 우호적이니 신라의 우호국이 될 수 없고요. 진흥왕 때 서쪽 북쪽 다 적이 되면서 진평왕 때도 고구려 백제의 공세에 직면해야 했습니다. 당연히 더 강대국인 고구려를 더 경계해야 했을 터. 실제로 선덕여왕 치세 전반기에 고구려가 쳐들어 온 적도 있으니까요. 그 결과 서쪽 국경은 방어가 더 취약해졋으리라 추측한다면, 의자왕 즉위 후 공격으로 영토 잃은 게 신라의 위기를 의미하는 건 맞지만, 선덕여왕이 암군이란 증거로 보자면 글쎄요. 선대에 위기의 원인이 뿌려졌는데, 선대가 잘한 걸 말아먹었다? 당장만 수습하고 나중에 터져도 원인제공자가 아니라 터졌을 때 사람을 탓할 인간들이네요. 

게다가 대야성을 잃은 게 큰 손실이긴 하지만 서라벌이 당장 백제에 공격 받을 수준은 아닙니다. 김유신이 지금의 경산인 압럅주 군주가 되어 방어하고 있었으니 이 쪽으로 서라벌을 공격하는 시도는 방어가 가능합니다.

3. 외부에서 전쟁에서 지고 영토를 잃는데 황룡사 9층목탑이나 만들어 백성들은 피폐해지고 귀족들의 불만도 누적되어 비담의 난이 일어났다. 더불어 나무위키에서는 비담의 난에 백성들도 가담해 기세가 높앗다고 말합니다.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 사실로 거의 단정하더군요.

그런데 삼국사기에서 김부식은 선덕여왕을 혹평하는데 이유는 여자라는 것 뿐입니다. 만일 백성의 삶이 피폐해졌으면 그것도 적고 그걸 근거로 이래서 여왕은 안 돼 했을 걸, 그런 기록이 없습니다. 진평왕 때도 부모가 자식을 팔 지경이더란 기록이 있는데요. 

그렇게 온 백성의 마음이 떠날 정도면 비담이 반란을 일으킬 게 아니라 화백회의에서 폐위시킬 만한데, 거의 죽을 때가 되어서야 반란을 일으킨 건 오히려 영토 상실에도 선덕여왕을 폐위시킬 수 없고 병중에야 반란을 도모할 정도로 명분이 부족하고, 그만큼 왕의 권위는 유지되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가 제 추측입니다.

비담이 화백에서 여왕 폐위한 걸 김춘추 김유신이 무력으로 막았다는 주장은 있긴 합니다. 서영교 교수의 주장이죠. 그러나 이것도 기록이 없는 이상 추측이고, 그나마 나무에 기술한 바는 이 주장도 언급 안 하는 걸 보면 그냥 귀족부터 백성 모두 선덕여왕을 싫어했다는 일방적인 추측을 적었을 뿐입니다.

역사가 승자의 기록이라 왜곡되었다 보기만도 그런 게, 일단 김부식이 여왕에 부정적이고, 직접적인 기록은 없어도 설화나 이변의 형태로 남은 민심의 불안을 적을 법 하거든요. 혹은 백성까지 폭넓게 가담한 반란이면 진덕여왕 즉위 후 엄청난 대숙청이 일어나거나 대대적인 민심 수습책이 나올만 한데 둘 다 없습니다. 30명의 가담자와 구족을 멸하긴 하는데, 상대등이 주도한 반란이면 가담자 30명이야 귀족 중 나올 숫자고, 백성까지 숙청할 범위는 아니죠. 

게다가 고구려 안원왕 사후 추군과 세군의 내전을 기록한 일본서기에라도 비담의 난의 뒷정황이 있다면 기록될만 한데, 그것도 아니고요. 결국 화백회의 여왕 폐위설, 백성 가담설은 다 추측일 뿐입니다. 긍정 평가는 추측 뿐이라면서요? 그런데 암군 평가도 추측이네요?

4.그러니 대략 결론. 되도 안 한 소리 좀 집어 치워라. 하고 싶으면 추측이라는 건 분명히 전제 해라 정도입니다. 

요즘 웹에서의 선덕여왕 평가에 대한 간단 잡상 을파소의 역사이야기

문명 6 확장팩의 한국 문명에 선덕여왕이 나오면서 생각해보니 요즘 웹에선 선덕여왕이 과장됐다를 넘어 희대의 암군으로 취급하는 분위기가 크다. 그 출처로 보이는 나무위키 보면 선덕여왕의 권위는 바닥으로 떨어진 거 같다,

그렇다면 선덕여왕의 측근에 폐주의 손자인 김춘추가 세력이 커지고, 상대등인 비담이 화백회의 추대를 노리지 않고 반란을 일으킬 필요가 있을까?

해군 기관지 담당자 누구냐 이순신/임진왜란


대한민국 해군. 미친 거냐. 돌은 거냐?

첫 머리부터 '원균은 임진왜란 때 수군으로서 일본군과 맞서 싸웠던 명장이다'

뭐 이 씨발 놈들아? 해군이라면서 이딴 쓰레기글을 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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