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방명록

2009년 새 방명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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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을파소 | 2009/12/31 23:59 | 방명록 | 트랙백 | 덧글(123)

이순신과 원균 바로보기(47)-이순신과 원균에 대한 평가: 임란 직후

 박정희가 이순신을 성웅화 하기 위하여 원균을 왜곡하였다면, 5,16 쿠데타 이전에는 원균을 맹장으로 평가하고 있었을 것이다. 어나, 일제의 이순신 성웅화를 박정희다 이어받았다고도 하니, 그 시점은 일제 이전으로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혹은 《선조수정실록》이 원균을 왜곡한 거라면, 그 이전에는 원균을 맹장으로 평가하다가 《선조수정실록》이 나오면서 뒤틀렸을 거다. 원균옹호론자들이 왜곡의 기점으로 삼는 것이니까.

 그럼 박정희와 일제시대, 《선조수정실록》편찬 이전을 본다면 이순신과 원균에 대한 제대로 된, 왜곡되지 않은 평가를 볼 수 있지 않겠는가?

 원균옹호론에서 그토록 원균의 참모습이 나와있다고 말하는 《선조실록》을 보자. 이들은 원균의 임란초기 수군 해산설도 "거기에 1만 있으면 전국에 50만, 그러니 구라, 선조수정실록 즐'이라고 외치지만, 《선조실록》에도 김수와 김성일의 보고를 토대로 이런 기록들이 나온다.

김수가 치계하였다.

“수영(水營)의 조라포(助羅浦)·지세포(知世浦)·율포(栗浦)·영등포(永登浦) 등 진이 이미 텅 비었는데 (중략)원균은 수군(水軍) 대장으로서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내지(內地)로 피하고, 우후(虞候) 우응신(禹應辰)을 시켜 관고(官庫)를 불태우게 하여 2백 년동안 저축한 물건들이 하루아침에 없어져버리게 하였습니다.
-선조실록 27권, 25년(1592년) 6월 28일

좌병사(左兵使) 이각(李珏)은 뒤이어 동래(東萊)로 도망하였으며, 우병사(右兵使) 조대곤(曺大坤)은 연로하고 겁이 많아 시종 물러나 움츠렸고, 우수사(右水使) 원균(元均)은 군영을 불태우고 바다로 나가 다만 배 한 척만을 보전하였습니다.
-역시 선조실록 27권, 25년(1592년) 6월 28일

 왜곡없이 원균의 용맹함이 기록되었다는 《선조실록》에도 원균이 군영을 태우고 내지로 도망쳤다고 나온다. 물론 허위보고거나 오해해서 올린 장계일 가능성도 생각해보고 싶을지도 모르겠지만, 원균의 초기 수군해산은 다른 사료와의 교차검증이 된다. 그리고 임진년 첫 해전인 옥포해전 당시 일본군은 별 경계없이 약탈을 하다고 당했다는 점도 그 지역에는 경계할 만한 조선 수군의 활동이 없었다는 반증이다. 이 상황을 이순신의 승리가 별 거 아니다라는 근거로 쓰면서, 원균이 사실 잘 싸웠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선조실록》에 실린 사관의 평도 신랄하다.

  사신은 논한다. 한산의 패배에 대하여 원균은 책형(磔刑)을 받아야 하고 다른 장졸(將卒)들은 모두 죄가 없다. 왜냐하면 원균이라는 사람은 원래 거칠고 사나운 하나의 무지한 위인으로서 당초 이순신(李舜臣)과 공로 다툼을 하면서 백방으로 상대를 모함하여 결국 이순신을 몰아내고 자신이 그 자리에 앉았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일격에 적을 섬멸할 듯 큰소리를 쳤으나, 지혜가 고갈되어 군사가 패하자 배를 버리고 뭍으로 올라와 사졸들이 모두 어육(魚肉)이 되게 만들었으니, 그때 그 죄를 누가 책임져야 할 것인가. 한산에서 한 번 패하자 뒤이어 호남(湖南)이 함몰되었고, 호남이 함몰되고서는 나랏일이 다시 어찌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시사를 목도하건대 가슴이 찢어지고 뼈가 녹으려 한다.
선조실록 99권, 31년(1598 년) 4월 2일

 이것이 맹장 원균에 대해 나온다는 《선조실록》실른 사관론이다. 물론 《선조실록》에 원균에 대해 좋은 말이 안 나오는 건 아니다.  하지만 단순한 인물평 차원에서 한 말은 있어도 그 중에 구체적인 전공을 언급한 경우는 거의 없다. 원균에 호의적인 사산론도 없는 건 아니지만, 대개 이순신, 권율과 함께 언급되어 공이 있다로 나온 정도일 뿐, 역시 구체적인 전공 언급은 없다.

 실록 이외의 기록은 어떨까? 역시 원균옹호론자들이 단골리 인용하는 《난중잡록》을 보면, 저자 조경남은 원균에게 동정적이었던 거 같긴 하다. 이렇게 적기도 하였으니까.

 원균이 비록 패하여 죽었으나 불충불의한 무리는 아닌 듯한데, 그 뒤에 기롱하는 이가 심히 많고 달천(達川)의 기록에는 빼고 넣지를 않았다. 그 기록에 든 사람들은 과연 모두 충의를 다한 사람으로써 원균이 그들의 만분의 1도 따라갈 수 없는 것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어찌 취하고 버리는 것이 그리도 공정하지 못하고, 당시에 장수된 자들이 원균보다 뛰어난 자가 몇 명이나 있었는고. 그 뒤에 논공(論功)할 때에 원균도 선무원훈(宣武元勳)의 반열에 참여하게 되었으니, 아! 왕법의 공정한 것을 볼 수 있도다. 만약 원균을 불충하다 하여 적에게 죽은 사실을 죄준다면 저 관망하고 퇴각하여 달아나서 목숨만을 위한 자에게는 장차 무슨 죄를 주어야 할꼬.

 그러나 이렇게 원균에게 호의적인 거 같은 조경남조차도 이런 기록을 함께 남겼다.

 경상도 연해의 왜적이 거제도(巨濟島)로 향하니 원균(元均)은 우후(虞侯)한테 군영을 지키게 하고는 배천사(白川寺)까지 달려갔는데, 우리나라 어선을 보자 왜적의 배인 줄로 생각하고 창황히 달아나 노량(露梁)으로 물러났다.

이에 앞서 경상 우수사 원균(元均)은 왜적들이 여러 성을 연달아 함락시켰다는 소식을 듣고 해군 함대를 이끌고 가덕도로 향했는데, 왜적의 배가 바다를 덮고 있는 것을 보자 마침내 퇴각하여 돌아오고, 여러 장수들도 점점 흩어져 가버렸다. 원균은 아군의 전함을 다 침몰시키고는 육지에 올라가서 왜적을 피하려 하였으나, 옥포만호(玉浦萬戶) 이운룡(李雲龍)이 안 된다고 하여 마침내 중지하였다.

수사(水使) 원균(元均)이 본진(本鎭)을 버린 뒤에 다만 전선(戰船) 네 채가 있었는데, 전라 좌우도의 수군을 청해 와서 세 번 해전을 벌여 아울러 크게 이겨서 수백 급을 베고 적선 백여 척을 부수었으며, 불에 타거나 물에 빠져 죽은 자가 헤일 수 없었습니다.

 이상의 기록들은 조경남이 《경상순영록》에서 인용한 원균의 임란 초기 수군해산에 대한 부분들이다. 다른 기록에서 인용했다지만 원균에게 좀 호의적이라는 사람도 그대로 적어넣을 정도로 의심할 여지도 없었다.

 그리고 조경남이 말한 '달천(達川)의 기록'이란 윤계선(尹繼先)이 1600년에 쓴 몽유계 소설인 달천몽유록(達川夢遊錄)을 말하는데, 《난중잡록》에도 수록되어 전해진다.

 내용은 호서를 암행하라는 어명을 받고 내려간 윤계선이 충주에 이르러 꾼 꿈 이야기로, 꿈 속에서 윤계선은 진왜란 때 희생된 여러 영령들이 넋두리하며 노래부르는 광경을 엿보다가 그 자리에 합석한다. 꿈에서는 임진왜란 중 전사한 여러 장군들이 등장하는데, 충주전투에서 패한 신립과 김여물을 비롯하여 조헌, 영규, 고경명 삼부자, 송상현, 김천일, 최경회, 이복남, 이억기, 이영남  등이 있었고, 그 중 제일 상석을 차지한 이는 바로 이순신이었다.

 윤계선이 자리를 파하고 내려가니 긴 시냇가에서 여러 귀신들이 손뼉을 치며 웃고 있기에 까닭을 물으니 원균을 놀리고 잇는 것었었다.  원균은 '배는 불룩하고, 입은 삐뚤어지고, 얼굴빛은 흙빛이 되어 기어왔으나' 결국 자리에 끼지도 못 했다. 조헌이나 송상현처럼 분전 끝에 전사한 이들은 물론이고 우리가 흔히 초반의 작전실패로 인한 패배 중 하나로만 생각하는 충주전투의 신립도 낀 자리에 원균은 합석하지 못하고 귀신들의 놀림감이나 된 것이다. 소설이지만, 1600년경 이순신과 원균이 어떤 이미지였는지를 엿볼 수는 있다.

 귀환 포로도 원균에게는 호의적이지 않다. 강항의 《간양록》에서는 이순신과 원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이순신(李舜臣)은 수로(水路)의 장성(長城)입니다. 죄상이 나타나지도 아니했는데 마침내 이옥(吏獄)에 잡아 넣고, 원균(元均)으로 그 임무를 대행하게 하였으니, 불가합니다. 임진년에 사로잡혀 갔다가 적을 따라 침략해 들어갔던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정유년 7월 15일에 왜장이 날쌘 군졸을 모집하여 경쾌한 배를 타고 우리 군사의 동정과 우리나라 병선(兵船)을 정찰하였다. 우리 병선의 군사들이 잠에 취하여 코를 골고 있으므로 적도(賊徒)가 급작스럽게 포(砲) 두 발을 발사하였다. 우리 군사가 다투어 닻줄을 끊으며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자, 적도가 달려가 병선을 끌고 와 일시에 진격하는 바람에 한산도(閑山島)가 마침내 무너졌다. 급기야 여러 왜장이 서해를 따라 서쪽으로 올라가 전라도우수영(全羅道右水營)에 당도하였는데, 이순신이 과선(戈船) 십여 척을 이끌고 힘껏 싸워 물리쳤다. 왜장 내도수(來島守)가 패전하여 죽고, 민부 대부(民部大夫)는 바다에 떨어져 겨우 죽음을 면하고, 그 나머지 작은 장수도 죽은 사람이 여러 사람이었다.”

하였습니다. 이 말로써 관찰하오면, 원균의 작전이 형편없었던 것과 순신이 적은 수를 가지고 많은 수를 당해낸 것을 대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정희득의 《해상록》에도 비슷한 기술이 나온다.

임진년에 포로된 사람으로 적을 따라 들어간 자는 모두 말하기를 ‘정유년 7월 15일에 왜장이 날랜 군사를 뽑아 가벼운 배를 타고 우리 군사의 동정을 정탐하려고 가 보니, 우리나라 수군은 곳곳이 코고는 소리뿐이었으며, 적도가 당장 두 방의 총을 쏘자 우리 군사는 다투어 뱃줄을 끊고 놀라 자빠져 어쩔 줄을 몰라 했고, 적도는 잽싸게 병선을 몰아와 일시에 진공하여 한산도가 방비를 잃었다.’ 했습니다. 원균(元均)의 패전한 죄는 목을 베어도 남음이 있을 것입니다. 모든 적이 이긴 기세를 몰아 바다를 따라 서쪽으로 올라오게 되었는데, 이순신이 10여 척 병선으로 백만 정예를 쳐 쫓아, 적장이 혹은 패해 죽고 혹은 바다에 떨어져, 겨우 죽기는 면했으나 움츠리고 물러가 감히 꼼짝도 못했으니, 순신같이 나라에 충성하고 수전에 능숙함이 당세에 어찌 짝할 자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큰 공이 겨우 이뤄지자 시기와 미움이 따라 이르러 마침내 파직되고 말았으니, 추악한 적도들도 모두 원통하다 일렀거늘, 어찌 크게 통석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죽은 사람과 부상자 다음으로 큰 피해자들이라 할 포로들에게 있어서 원균은 작전이 형편없고, 목을 베어 마땅한 죄를 지은 자였다.

 이덕형의 막역한 친구로 잘 알려진 백사 이항복. 이덕형의 말을 금과옥조로 여기는(정작 그로부터 1년 후에 한 말은 안 듣지만) 원균옹호론자들이니, 그의 친구이며 역시 당대의 명신 이항복의 이순신과 원균에 대한 평도 귀담아 들이리라 기대 해 보며 그의 말로 마무리 해본다.

 그리고 원균(元均)의 경우는 다만 남을 의지해서 일을 성취시킨 자이니, 진실로 감히 이순신(李舜臣)과는 공을 겨룰 수가 없다.

by 을파소 | 2009/11/29 19:56 | 이순신/임진왜란 | 트랙백 | 덧글(14)

이순신과 원균 바로보기(46)-《선조수정실록》이 원균을 왜곡했을까?

 원균옹호론자들이 즐겨 말하는 주장이 있다. 원균은 본래 《선조실록》에는 뛰어난 맹장으로 기록이 되어 있는데, 인조반정 이후 이순신과 같은 가문인 택당 이식에 의하여 《선조수정실록》이 편찬되면서 비겁자라는 이미지로 왜곡되면서 오늘날의 원균의 모습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원균은 정말 《선조수정실록》에 의하여 왜곡되었는가? 물론 아니다. 지금가지 살펴본 원균옹호론자들의 주장이 항상 그랬던 것처럼.

 먼저 실록이 수정된 경우에 대하여 살펴보자. 조선후기에 실록이 수정된 사례가 몇 번 있는데, 비록 실록이 고치더라도 수정 이전의 실록도 함께 남겨두어 서로 비교가 가능하게 하였다. 이런 원칙으로 고쳐진 실록은 《선조수정실록》, 《현종개수실록》, 《숙종실록 보궐정오》, 《경종수정실록》이 있다.

 그런데 실록이 고쳐진 경우가 ‘수정’, ‘개수’, ‘보궐정오’라는 식으로 조금씩 다른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는 실록이 고쳐진 범위와 정도에 따라 달라진다. ‘수정’은 수정자의 관점에서 사실의 착오를 바로잡거나 누락된 내용을 덧붙이는 정도라서 고쳐진 부분이 많지 않았다. 그러나 ‘개수’는 처음의 실록은 완전히 부정하고 완전히 새로 편찬하는 경우였다. 따라서 원래의 실록과 동일기사도 다시 쓰고, 사신론도 새로 쓰는 일이 많았다. ‘보궐정오’란 잘못된 문자나 기사를 발견하여 빠진 건 보충하고 잘못된 건 다시 쓴다는 의미로, 개정된 부분은 따로 편찬하지 않고 본래 실록의 권말에 부기하여 합본한 일종의 부록이었다.

 즉,책을 썼는데 나중에 그 책의 틀린부분만 좀 고친다면 ‘수정’, 처음부터 다시 쓰면 ‘개수’, 잘못된 부분을 고치는 걸 부록으로 덧붙이면 ‘보궐정오’이다. 이러하니 《현종개수실록》은 분량이 23권 23책인 《현종실록》보다 더 많아져서 29권 29책으로 늘어났다. 하지만 수정실록은 일부 내용만 고치는 정도이다 보니 그 분량은 본래 실록보다 더 적어서 《선조실록》은 221권 116책이지만 《선조수정실록》은 42권 8책, 《경종실록》은 15권 15책이지만 《경종수정실록》은 5권 5책이다.

 자, 여기서부터 원균옹호론자들의 주장의 허점이 나온다. 《선조수정실록》은 그 성격이 《선조실록》의 보충자료 수준일 수밖에 없다. 당연히 사학자들은 연구를 하자면 《선조수정실록》보다는 《선조실록》 쪽을 더 많이 볼 수밖에 없다. 비록 《선조실록》에 기록된 사실도 연구가 부족한 겨웅도 있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멀쩡한 《선조실록》을 놔두고 《선조수정실록》만 보고 원균에 대하여 오해할 정도로 이 나라 사학자들은 바보들이 아니다. 임진왜란을 연구하는 자라면 당연히 《선조실록》을 읽는다. 그런 걸 실록을 접할 일이 적은 일반인들을 상대로 《선조수정실록》 때문에 원균이 왜곡되었다느니 망발을 일삼는 것이다.

 그래도 사학자들을 의심할 사람이 있을까봐 좀 더 원균옹호론자들의 허위성을 살펴보겠다.

 조선후기에 실록이 개정된 경우는 대개 당쟁의 산물이었다. 원래의 실록을 편찬할 때의 집권당을 몰아내고 다른 당파가 집권을 하면서 새로운 집권당이 본래 실록에 불만을 가지고 실록 개정을 주도한 것이다.

 《선조수정실록》 역시 예외는 아니다. 《선조실록》은 광해군 1년인 1609년부터 편찬하기 시작하여 그 이듬해에 완성되었다. 처음에는 서인인 이항복이 총재관이 되었으나, 그 뒤 북인인 이이첨과 기자헌을 중심으로 편찬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1623년에 서인이 주도하고 남인이 동조한 인조반정으로 대북파 정권이 붕괴하고 남인 원로 이원익이 영의정이 되는 외형상으로는 서남인 연립정권, 실질적으로는 서인정권이 수립되었다. 서인입장에서는 서인 이이, 성혼, 정철 등에 대하여 비방기록이 있는 좌편향 대북편향적인 내용이 실린 《선조실록》이 마땅치 않았다. 또한 북인 이산해, 이이첨 에 대한 기록도 불만스러웠다.

 이러한 배경으로 인조 즉위 초기 경연관 이수광과 임숙영 등에 의하여 《선조실록》의 수정이 건의되었다. 좌의정 윤방 또한 《선조실록》의 수정을 건의하지만 이괄의 난과 정묘, 병자호란 등이 내우외환이 이어지면서 《광해군일기》의 편찬까지도 큰 차질을 빚을 사정이었기에 시행되지 못 하였다.

 그러다가 다시 《선조실록》의 수정이 다시 건의된 것은 1641년으로 대제학 이식의 건의에 의해서였다. 결국 이식을 책임자로 하여 《선조수정실록》의 편찬이 추진된다. 하지만 1646년 이식이 다른 일로 파직당하면서 실록 수정도 중단되었다가, 10여년 후인 1657년 좌의정 심지원의 건의로 영돈녕부사 김육과 윤순지, 이일상 등의 주관으로 수정을 재개, 그 해 9월에 완성된다. 그래서 《선조수정실록》은 1567년(선조 즉위년)부터 1596년(선조 29년)까지는 이식에 의해, 1597년(선조 30년)부터 1608년(선조 41년)까지는 김육 등이 편찬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여기, 여기)

 원균옹호론자들의 주장을 보자면 이식이 원균을 왜곡하려고 실록을 수정한 것 같지만, 《선조수정실록》은 엄연히 서인의 당파적 이익에 의하여 편찬된 것이다. 이식이 수정 작업을 주도하였다고는 하나 그의 개인적 입장에 따른 게 아니다. 

 더군다나 이식이 특별히 원균을 깎아내리고 이순신을 칭송할 이유는 없다. 이식과 이순신은 같은 덕수이씨로 이순신은 시조 이돈수의 12세손, 이식은 15세손이라고는 하나, 그들의 조상은 4세손일 때부터 갈렸기에 현대의 개정 민법 기준으로는 두 집안의 남녀가 결혼을 하더라도 법적 문제가 없을 먼 친척 관계였다. 만일 임진왜란이란 전쟁이 없이 평화기만 이어졌다면 이식은 기껏해야 이순신의 이름 석자나 겨우 들어봤을 것이다. 그야말로 본관만 같지 꽤나 먼 친척을 위하여 《행장》을 써주는 것도 아니고 국가 공식기록인 실록에 손을 볼 정도로 절친한 사이는 아니다. 더군다나 아무리 이식이 주도하더라도 결국은 국가 공식기록인 것을.

  그리고 무엇보다도 과연 《선조실록》이 과연 원균에게 호의적이긴 한 것인가? 이 연재를 한 번 돌아보면 필자가 《선조수정실록》보다는《선조실록》을 인용하여 왔다. 그것만으로도 원균의 죄악과 실체를 보여주기에는 충분했다. 정말 《선조실록》이 원균에게 호의적이라면 이런 일이 가능하겠는가?

 물론 《선조실록》에 원균에게 호의적인 말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그 말은 거의 대부분 원균을 띄워서 이순신을 견제하려거나 칠천량 해전 이후 원균을 통제사로 임명한 책임을 회피하려는 선조의 말, 혹은 임금의 비위를 맞추려고 하거나 이순신을 침으로 남인을 공격하려는 대신들의 말, 아니면 떠도는 소문이나 원균의 말만 듣고 발언하는 경우였다. 원균이 “그 사람 용감해요.”라는 식의 말은 있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용감히 싸웠는가 하는 말은 없다. 임진왜란 초기 원균이 단독으로 적선 10척 혹은 30척을 분멸했다는 것도 원균 옹호론자들의 주장은 오직 원균 자신의 말, 혹은 이순신 등 다른 사람들이 “원균 말로는 그러더군요.”라는 말을 이용한 수준이었다. 심지어 원균을 선무1등곤싱으로 올린 선조조차도 원균이 구원을 청한 공이 잇다고 했지, 처음으로 적선을 분멸한 공이 있다는 말은 끝내 안 한 걸 보면 원균옹호론의 시조에게 조차 인정받지 못한 정체불명의 공로다.

 하지만 대신 원균이 인사고과 문제로 탄핵당하거나 뇌물을 받아 탐학하다는 얘기, 충청병사 시절 산성을 부실 공사한 얘기, 역시 충청병사 시설 병마사는 종사관을 둘 수 없는 법도를 어기고 종사관을 두었는데 그 종사관이라는 작자는 임진년에 피난민 목을 베어 적군으로 위장하여 공을 세우려다가 실패한 인물이란 이야기, 칠천량 해전을 전후하여 처음에는 큰소리치다가 나중에 ‘패배’라기도 민망한 수군 ‘해산’ 이후 잠적하는 이야기 등은 《선조실록》에 충분히 나온다.

 《선조실록》의 사관론 중에 간단하게나마 원균을 이순신과 함께 힘써 싸운 인물로 평가해놓은 경우도 있긴 하다. 그러나 그런 사관의 사관론은 전쟁의 승리는 명나라 덕분이라는, 선조의 논리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그리고 원균을 비판하는 사관론은 그 보다 훨씬 많다.

 그럼 《선조수정실록》 에 나온 이순신은? 연전연승 한 기록이나, 그가 전사하면서 백성들이 슬퍼한 풍경이 나오기는 하지만, 그에게 유리한 기록만 나오는 건 아니다. 

 처음에 원균(元均)이 이순신에게 구원병을 청하여 적을 물리치고 연명(聯名)으로 장계를 올리려 하였다. 이에 순신이 말하기를 ‘천천히 합시다.’ 하고는 밤에 스스로 연유를 갖춰 장계를 올리면서 원균이 군사를 잃어 의지할 데가 없었던 것과 적을 공격함에 있어 공로가 없다는 상황을 모두 진술하였으므로, 원균이 듣고 대단히 유감스럽게 여겼다. 이로부터 각각 장계를 올려 공을 아뢰었는데 두 사람의 틈이 생긴 것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문제의 임진년 연명장계 문제. 실상은 각자 따로 올려도 되는 걸 원균이 자기 공이 없으니 억지로 연명으로 얼리자다가 거절당한 것. 임진년에는 아무 문제 없다가 정유년 이순신이 파직당하기 직전에야 이산해의 입에서 이 얘기가 나온다. 하지만 단독으로 올리 경우데도 주변의 관리들도 그 내용을 알 수 잇기에 몰래 올렸다는 건 떡밥에 불과하다. 그러나 《선조수정실록》에는 이렇게 원균옹호론자들이 주장하는 바가 그대로 실렸다. 그래서 《선조수정실록》이 왜곡투성이라고도 잘 말하다가 이 부분은 잘도 인용한다. 

이조 좌랑 김신국(金藎國)이 서계하였다.
 
“지난번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이, 부산 군영을 몰래 불태운 사실을 조정에 보고하였는데, 이원익(李元翼)이 신에게 말하기를 ‘군관 정희현(鄭希玄)이 일찍이 조방장(助防將)으로 적의 둔영(屯營) 근처에 오래 머물면서 부산 수군 허수석(許守石)을 심복으로 삼았었다. 수석이 적진을 드나들었는데, 그의 동생이 부산 군영에 있었기 때문에 적의 정세를 잘 알았다. 마침내 수석과 계책을 세워 날짜를 약속하여 몰래 적의 둔영을 불태웠는데, 그날 순신의 군관이 마침 부산에 이르렀다가 먼저 순신에게 보고하여 자기의 공로로 삼은 것이다. 그런데 순신은 그런 내용을 전혀 모르고 그렇게 계문한 것이다. 이제 수석과 다시 도모하는 바가 있는데, 만약 수석에게 벼슬을 상으로 내리면 일이 혹 누설될까 싶고, 공로를 순신의 군관에게로 돌리면 수석이 반드시 분하게 여겨 현재 도모하는 일이 제대로 되지 않을까 싶다.’고 하였습니다.”

 부산왜영방화사건 역시 이순신이 먼저 장계를 올린 후 김신국이 그게 아니라며 장계를 올렸는데 그러면서 이원익이 더 자세히 안다고 하고, 이원익은 김신국이 더 잘안다고 서로 미룬 일이다. 그러나 정작 허위보고의 장본인이어야 할 안위는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고, 선조도 이순신이 안위의 공을 빼앗은 양 알해 사실상 부산왜영방화의 주도자가 안위 임은 인정한 바 있지만, 《선조수정실록》에서는 이순신의 허위보고로 기록되었다. 이순신이라고 특별히 더 유리하게 나온 것만은 아니다.

 그리고 사실《선조수정실록》이 나온 인조에서 효종 때에 있어서, 아니 임란 직후부터 원균에 대한 평가는 더 이상 좋을 게 없어서 이식이 굳이 일부러 왜곡할 필요도 없었다. 《선조수정실록》도 이식의 창작이 아니라 여러 개인 문집 등을 참고한 것이니, 거기에 나온 원균 평이 나쁘다면 그건 신빙성 있는 자료들에 나온 원균의 모습이 그랬다는 뜻도 된다. 부디 《선조수정실록》이 왜곡했네 같은 소리를 하고 싶다면 먼저 《선조실록》부터 살펴 봐라.

by 을파소 | 2009/11/29 01:18 | 이순신/임진왜란 | 트랙백 | 덧글(16)

잡담

1. 메일을 보니 4대강 소송 접수했다고 왔네요. 일단은 결과를 지켜볼 일...

가카는 TV 나오셔서 무슨 얘기를 하셨담?

2. 알라딘에서도 메일을 보냈는데, 역사책 한 권 사고 다른 보고 싶은 역사책 하나 골라 그 이유 달면 추첨해서 준다네요.

행사목록을 보니....

백모 재미사학자의 책이라던가, 이X일씨의 책은 없네요.

알라딘, 잘 빼먹었다.

3. 가벼운 기침이 꽤 오래 가더군요. 차라리 기침이 심하고 열이라도 났으면 신종플루 의심해서라도 병원 가봤을텐데, 가벼운 증사잉라고 그냥 있다가 오래 가는 거 같아 병원에 가 봤습니다.

인후염 같다고 주사 맞고 처방전 써주더군요.

하긴 제 생활습관과 환경을 돌이켜 보면 인후염 정도 걸린 건 전혀 이상할 게 없더군요. ㅡㅡ;

4. 요즘 들어 가진 최대의 의문.

애 내 양말은 분명히 짝이 다 맞게 갖쳐져 있었는데, 어느새 한짝만 남은 것들이 증가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는 필시 양말 한짝만 먹는 기이한 요정이 존재하기 때문일....(맞는다)

by 을파소 | 2009/11/28 01:26 | 을파소의 잡담 | 트랙백 | 덧글(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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