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루스 역밸 유저라면 당연히 비웃고 넘어가겠지만, 명량대첩에는 몇 가지 속설이 사실처럼 받아들여진다. 하나는 조선군이 철쇄를 사용해 승리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강강수월래의 기원이 이 때 멀리서 우리 군사가 많아 보이게 하려고 한데서 시작됐다는 것이다.
이런 속설은 몇년 전의 모 사극에서도 명량대첩 부분에 나온바 있으며, 심지어 철쇄 사용설은 같은 방송국의 역사 다큐에서도 신빙성있는 거처럼 다뤄진 적도 있다.
흔히 명량대첩에
대하여 미리 설치한 철쇄에 일본 배들이 걸리고, 그 틈을 타서 조선군이 맹공격을 하였다는 식으로 묘사가 된다. 그리고 판옥선은 평저선이지만, 일본 배들을 침저선이라 조선 배는 철쇄에 안 걸리지만 일본 배는 걸린다 라는 친절한 설명도 덧붙인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일까?
오늘날의 해군은 기뢰부설함이 있고, 잠수함 같은 배로도 기뢰 부설이 가능하기에, 철쇄 같은 건 필요 없이 기뢰를 통하여 적 해군을 차단할 수 있다. 그러나 변변한 기계 장치가 없는 조선시대라면 모든 걸 인력으로 해결해야 한다. 그렇다면 과연 사람의 힘으로 아무리 좁은 수로라지만, 매우 강한 조류가 흐르는 바다를 가로지르면서 길게 철쇄를 거는 게 상식적으로 가능한가? 그걸 걸더라도 배 몇 척 걸리고 나면 사람이 설치해놓은 것이 끊어지거나 풀리지는 않겠는가? 기계의 도움 없이 그런 일을 해내려면 조선 수군에 화가 나면 녹색거인으로 변신하는 특이체질의 소유자나, 녹색 운석 앞에서는 힘이 약해지는 외계인이라도 있어야지 가능하다. 아니 그런 애들 있으면 철쇄 놓기 전에 그냥 적군을 다 쓸어버리면 되잖아?
상식적으로도 불가능한 일이거니와, 실제로도 철쇄 가설을 뒷받침하는 기록도 없다. <
난중일기>나 <선조실록>, <징비록> 등 신빙성 높은 사료에는 철쇄 얘기도 나오지 않으며, 당시 급하게 진지를 이동한 조선 수군에게 철쇄를 만들고 설치할 만한 여유도 없었다. 더군다나 모든 게 부족한 조선 수군의 상황을 생각하면, 그런 철쇄를 만들 철이 있으면 화포나 여타의 무기를 만드는 게 더 효율적이다.
철쇄 가설의 근거가 되는 기록은 이중환의 <택리지>나 전라우수사 김억추가 용력으로 철쇄를 가설했다는 <호남절의록>, 김억추의 후손들이 20세기 초에 기록한 <현무공실기> 등이 있다.
하지만 <택리지>는 기본적으로 역사서가 아닌 지리지로서 철쇄 얘기도 지방의 설화를 기록한 것에 불과하며 실질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지는 못 하다.
뛰어난 용력으로 김억추가 철쇄를 가설했다는 <호남절의록>의 기록도 당연히 현실성 제로.
<현무공실기>는 여타의 행장류가 그러하듯이 조상을 터무니없이 칭송하는 기록에 불과하다. 그나마 당대도 아닌 후대의 기록이다. 게다가 <현무공실기>에는 김억추가 칼을 한 번 휘둘러서 적선 수백척을 격침시켰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그러니까 현무공의 정체가 실은 얘였다거나? 철쇄가 실은 철쇄아의 와전이라면 그럴 듯 하다.(어디가!)
그리고 그 정도 철쇄는 만들려면 많은 양의 철이 필요하다. 그러나 명량대첩 당시의 조선 수군은 모든 게 부족한 상황. 그럴 철이 있으면 무기라도 더 만드는 게 낫다.
좌수영에서 발견된 수중장애물의 흔적을 근거로 철쇄설을 주장하기도 하지만,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울돌목은 물살도 거세고 당시 조선 수군은 자원도 없고, 시간도 없었다. 그 사이 그 지형에 철쇄를 설치할 여유는 아무리 이순신이라도 없다.
그럼 강강수월래는?
강강수월래의 유래는 무엇인지 정확하지가 않다 그런데 여기에는 이순신과 관련된 속설이 전한다. 그러나 그야말로 속설에 불과한 것이 유력한 학설인양 둔갑을 하고 있는데 그 실체를 알아보자.
이순신과 관련된 걸로 몇년전 방영한 모방송사의 드라마의 내용과 일치하는 것이 있다. 명량대첩 시 병력이 부족하자 이순신은 아낙네들을 동원하여 강강수월래를 추게 하여 아군 병력이 많은 것처럼 위장하였다는 속설이 전한다. 이것은 조금씩 내용을 달리하여 산봉우리에서 강강수월래를 했다는 것, 갯마을에서 했다는 것 등이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속설일 뿐이다. 우선 <난중일기>어디에도 강강수월래에 관한 기록이 없다.
게다가 명량대첩 처럼 아군은 부족하고 적군은 수없이 많은 전투에서 여자들을 병사로 위장시키는 작전은 매우 위험하다. 단병접전에 강한, 게다가 공성전이나 수성전에서는 패한 일도 많지만 야전에서는 대부분 이긴 일본군이 육지의 병사들을 본다면, 병력도 충분하니 후방 함대의 병력을 상륙시켜 도륙할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되면 변변한 훈련도 못 받은 여자들의 운명은 비참한 꼴을 맞이할 것이다.
그리고 일본군 눈이 다 시력 마이너스만 모여있었겠는가? 처음엔 단순히 빙빙 도는 것을 보면 처음에는 속는다고 치자. 하지만 자세히 관찰하면 단순히 손 잡고 도는 것이라는 걸 깨달을 수 있다. 거기에 그렇게 병력이 많으면 포구에 방치된 판옥선을 더 끌고 나오던가, 육지에서라도
화살과 포를 쏘며 공격하던가, 아니면 매복이라도 할 일이지 단순히 움직이기만 하면 일본 장수들이 아무런 의심을 안 할 리가 있을까? 내 머리 속에서도 나오는 생각인데, 이순신이 이런 걸 생각 못할 리가 없으니 여자들을 무리하게 끌어들이는 작전을 구사하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실제 작전이었다면 <난중일기>나 <징비록>, 이순신의 조카 이분의 <행록>에 기록되던가, 당시 수군 장수들의 가문에서 쓴 <행장>에라도 ‘우리 조상이 강강수월래 제안 했습니다.’라는 조작이라도 있어야 할 텐데 그런 기록은 전혀 없다.
그럼 강강수월래의 유래는 무엇인가? 서두에 언급한 바와 같이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추석의 유래는 신라로 거슬러 올라가고, 고구려나 부여, 백제 등 다른 고대국가들 역시 제천 행사들을 가졌는데, 이런 행사들은 여러 사람들이 어울리는 축제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어울리는데 모두 손잡고 빙빙 돌며 춤을 춘다는 발상은 고대인들의 시각에서도 어렵지 않게 생각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도 마한에 대하여 ‘5 월에 씨를 다 뿌리고 귀신을 제(祭)한다. 때를 지어 모여 노래하고 춤추며 술을 마신다. 밤낮 쉬지 않고 수십 명이 함께 춤을 추는데, 다 같이 함께 일어나 서로 따르며 가락에 맞추며 손발을 맞추어 몸을 높였다. 낮췄다 하면서 땅을 밟는다. 이와 같이 탁무(鐸舞)와 비슷한 춤을 10월 농사를 끝낸 후에 또 다시 춘다.’라는 기록이 있는 걸 보면 강강수월래의 원형은 고대로 거슬러 올라감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마한이면 지금의 전라도 일대와 일치한다.
결국 강강수월래는 전라도에서 오래 전부터 전해지다가 이 곳이 이순신의 주 활동무대와 겹치면서 이순신과 관련된 속설이 퍼진 게 된 것이라 생각한다. 백성들 사이에야 이런 속설이 퍼질 수도 있다. 하지만 강강수월래에 관한 속설 소개라면 몰라도 진짜 유래인양 설명한다면 그건 문제이다. 아무리 드라마라도 공영방송국의 정통사극에 이런 속설이 그대로 반영되는 건 사람들의 잘못된 인식을 확고히 해줄 수 있으니 역시 문제이다.
결국 명량대첩은 단 13척의 판옥선으로 5,6백 척의 적을, 후방에 있는 수송선들을 제외하고라도 300척 이상의 적을 상대해야하는 전투였다. 더불어 철쇄 같은 건 없고, 강강수월래를 출 일도 없다. 칠천량해전의 여파로
사기는 바닥이다. 조정은 아무것도 지원해주지 않았다. 부하장수들도 모두 겁을 먹은 지라 통제사 이순신이 믿을 건 자기 자신 밖에 없었다. 그야말로 최악의 조건에서 싸워야 했던 것이다.만일 이것이 역사가 아니라 어느 소설의 줄거리였다면, 그 소설을 리얼리티가 형편없다는 비판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소설이 아닌 역사였다. 누가 봐도 절대 이기지 못할 것 같은 싸움, 그 앞에 이순신은 고독하게 맞서고 있었다. 하긴 그런 싸움에 압도적으로 이겼으니, 이런 속설이 사실처럼 받아들여지는 것도 납득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