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방명록

2009년 새 방명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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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을파소 | 2009/12/31 23:59 | 방명록 | 트랙백 | 덧글(103)

이순신과 원균 바로보기(39)-아들 이면의 죽음

 명량대첩 후 어외도로 진을 이동한 이순신은 19일에는 법성포를 거쳐서 홍농 앞바다, 20일에는 위도, 21일에는 고군산도로 이동한다. 그 후 다시 10월 3일 법성포를 거쳐서 9일에 우수영으로 돌아온다. 이러한 이동은 비록 명량대첩으로 일본에 대하여 압승을 거두기는 하였지만 그만큼 화약 등의 소모도 많았기에 물자와 전열을 재정비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상황에서 일본 수군이 한 번 더 대규모로 몰아치면 이순신이라도 난처한 지경에 빠지겠지만, 그런 일이 없었다는 건 겨울이 다가온다는 이유도 있지만, 일본 수군이 명량대첩에서 막대한 타격을 입었다는 걸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수군 재건을 위해 박차를 가하던 중인 10 14일 새벽, 이순신은 꿈을꾼다. 꿈에서 이순신은 말을 타고 언덕 위를 가다가 말이 발을 헛디뎌서 냇가로 떨어졌는데, 막내아들 이면이 엎드려서 자신을 안는 듯한 모습을 보았다. 이 꿈이 무슨 조짐인지 알 수는 없고, 내수사의 종이 기르던 소 중 12마리를 일본군이 끌고 갔다는 보고를 받는 등 공무를 보았다.

 그 날 저녁에  천안에서 온 사람이 집안 편지를 전달한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는지 이순신은 봉한 것 을 뜯기도  전에 뼈와 살이 먼저 떨리고 정신이 아찔하고 어지러웠다. 편지를 쓴 이는 둘째 아들 이열이었는데, 편지 겉봉에는 통곡(痛哭)이라는 두 글자가 적혀져 있는 것을 보고 그 내용을 짐작하였다. 바로 막내아들 이면의 전사소식을 전하는 편지였다. 이순신은 편지롤 보고 목 놓아 통곡하였다.

 이면은 충청도 아산의 본가에 머물고 있었는데, 일본군이 아산을 급습하자 다른 가족들은 피신시키고 맞서 싸우다가 숨을 거둔 것이다. 드라마나 소설에서는 이순신에 대한 보복 작전으로 많이 묘사되지만 실제로 그랬다는 입증자료는 없다. 

 이면은 다른 아들들이나 조카들과 함께 이순신이 머문 진영과 아산집 사이를 여러번 왕래한 바 있다. 그렇게 이면이 아산집으로 갔을 때, 이순신은 아들이 무사히 도착했는지 걱정되어 전전긍긍하였다. 한번은 이면이 피까지 토하는 중병에 걸렸다는 소식에 매우 걱정하여 점까지 쳐보았다. 그 결과 '임금을 만나 보는 것과 같다는 괘'가 나왔다. 그 때 임금은 선조긴 하지만 어쨌든 매우 좋은 괘였다. 다시 해보니 이번엔 '밤에 등불을 얻은 것과 같다는 괘'가 나왔다. 역시 좋은 괘였다. 그리고 며칠 후 이면의 병세가 호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뻐하였다.

 그런 아들이 비명횡사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이순신은 <난중일기>에서 그 심정을 이렇게 토로한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인자하지 못 하시는고,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것 같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에 마땅한데,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이런 어긋난 일이 어디 있을 것이냐. 천지가 깜깜하고 해조차도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남달리 영특하기로 하늘이 이 세상에 머물러 두지 않는 것이냐. 내가 지은 죄 때문에 앙화[殃禍]가 네 몸에 미친 것이냐. 내 이제 세상에 살아 있은들 누구에게 의지할 것이냐. 너를 따라 같이 죽어 지하에서 같이 지내고 같이 울고 싶건마는 네 형, 네 누이, 네 어머니가 의지할 곳이 없으므로 아직은 참고 연명이야 한다마는 마음은 죽고 형상만 남아 있어 울부짖을 따름이다. 하룻밤 지내기가 1년 같구나.

 17일에는 새벽에 향을 피우고 곡을 하는데, 하얀 띠를 두르고 있으니, 비통함을 정말 참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19일에는 고향집 종이 내려오니 그걸 보고 아들 생각이 나서 다시 통곡하였다. 날이 어두워질 무렵에는 코피를 한 되 남짓 흘리고, 밤에 앚아 생각하니 다시 눈물이 났다. 아직 어머니의 상중인데다가 아들까지 잃어 그 슬픔이 더할 수 박에 없었다. 

 11월 7일에는 자정 무렵 자는데 꿈에서 이면이 죽는 것을 보고 구슬프게 울었다. 23일에는 아산집으로 편지를 쓴느데 죽은 아들 생각에 눈물이 흘렀다. 그렇게 한 척의 배로 수백척의 적선에 당당히 맞서는 용장도 아버지로서는 여느 사람과 다를 게 없었다.

 이분의 <행록>에는 이면의 죽음에 관한 드라마틱한 장면이 나온다. 이면의 전사 4개월 후, 이순신의 꿈에 이면이 나타나서 “날 죽인 적을 아버지께서 죽여 주십시오!”라고 울면서 말하였다. 그러자 이순신이 “네가 살아 있을 때는 장사였는데, 죽어서는 그 적을 죽이지 못 하겠다는 말이냐?”라고 하니, 이면은 “제가 그 놈의 손에 죽었기 때문에 겁이 나서 그놈을 못 죽이겠습니다.”고 하였다. 그리고 “아버지로서 자식의 원수를 갚는 일에 저승과 이승이 무슨 간격이 있을 것입니까?”라고 말하고는 슬피 울면서 사라졌다. 잠에서 깬 이순신이 잡혀온 일본 포로들을 조사하니, 그 중에 이면을 죽인 장본인이 있었다. 그래서 이순신은 그 일본군을 죽임으로 이면의 복수를 하였다. 흥미로운 이야기지만, <행록>에만 전하기에 이순신의 조카이자 이면의 사촌인 이분이 사촌의 죽음과 그 일로 가슴 아파 한 숙부를 안타깝게 여겨 넣은 이야기일 수도 있는 것이다.

 아들의 죽음은 가슴아프지만, 백의종군 길에 오르면서 어머니의 상도 모시지 못한 이순신은 수군을 재건해야 하는 통제사이기에 아들의 죽음을 슬퍼할 겨를도 없었다. 그렇기에 그 슬픔은 표출하지는 못 해도 더했을 것이다. 그도 위대한 장군이기 전에 아들이요, 아버지였으니까. 그리고 이런 모습을 찾는 것이 이순신의 진짜 인간적인 모습을 찾는 것이다. 원균은 이순신을 모함하지 않았고 오히려 이순신이 먼저 원균을 모함한 거라고 모르면서 아는 척 인간 이순신을 복원한다고 개소리하는 게 아니라. 

by 을파소 | 2009/11/07 15:44 | 이순신/임진왜란 | 트랙백 | 덧글(18)

제가 법을 잘 몰라서 그러는데요

도대체 학생이라 용서해주시는 이유가 뭡니까?

요새 학생이라는 놈들 외국인 강간도 쳐 하고 다니는 것들입니다.

인정사정 보지말고 대한민국 법의 냉혹함을 알게 해야 합니다.

.....저쪽의 마음에 들지 않는 역사관을 피력하는 것이 외국인 강간에 준하는, 그래서 대한민국 법의 냉혹함을 느껴야 하는 극악한 범죄행위인가요?

대한민국이 특정역사관을 금지하고 있나요? 지금 집권당이 한나라당인 줄 알았는데, 국가사회주의대한노동자당으로 교체됐나요?

출처는 다들 짐작하시는 그 사이트 그 게시물의 덧글.

그러고보니 아이피차단 아직 안 당했네?

by 을파소 | 2009/11/06 18:08 | 을파소의 역사이야기 | 트랙백 | 덧글(18)

이순신과 원균 바로보기(38)-명량대첩에 얽힌 잘못된 속설

 이글루스 역밸 유저라면 당연히 비웃고 넘어가겠지만, 명량대첩에는 몇 가지 속설이 사실처럼 받아들여진다. 하나는 조선군이 철쇄를 사용해 승리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강강수월래의 기원이 이 때 멀리서 우리 군사가 많아 보이게 하려고 한데서 시작됐다는 것이다.

 이런 속설은 몇년 전의 모 사극에서도 명량대첩 부분에 나온바 있으며, 심지어 철쇄 사용설은 같은 방송국의 역사 다큐에서도 신빙성있는 거처럼 다뤄진 적도 있다.

 흔히 명량대첩에 대하여 미리 설치한 철쇄에 일본 배들이 걸리고, 그 틈을 타서 조선군이 맹공격을 하였다는 식으로 묘사가 된다. 그리고 판옥선은 평저선이지만, 일본 배들을 침저선이라 조선 배는 철쇄에 안 걸리지만 일본 배는 걸린다 라는 친절한 설명도 덧붙인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일까?

 오늘날의 해군은 기뢰부설함이 있고, 잠수함 같은 배로도 기뢰 부설이 가능하기에, 철쇄 같은 건 필요 없이 기뢰를 통하여 적 해군을 차단할 수 있다. 그러나 변변한 기계 장치가 없는 조선시대라면 모든 걸 인력으로 해결해야 한다. 그렇다면 과연 사람의 힘으로 아무리 좁은 수로라지만, 매우 강한 조류가 흐르는 바다를 가로지르면서 길게 철쇄를 거는 게 상식적으로 가능한가? 그걸 걸더라도 배 몇 척 걸리고 나면 사람이 설치해놓은 것이 끊어지거나 풀리지는 않겠는가? 기계의 도움 없이 그런 일을 해내려면 조선 수군에 화가 나면 녹색거인으로 변신하는 특이체질의 소유자나, 녹색 운석 앞에서는 힘이 약해지는 외계인이라도 있어야지 가능하다. 아니 그런 애들 있으면 철쇄 놓기 전에 그냥 적군을 다 쓸어버리면 되잖아?

 상식적으로도 불가능한 일이거니와, 실제로도 철쇄 가설을 뒷받침하는 기록도 없다. <난중일기>나 <선조실록>, <징비록> 등 신빙성 높은 사료에는 철쇄 얘기도 나오지 않으며, 당시 급하게 진지를 이동한 조선 수군에게 철쇄를 만들고 설치할 만한 여유도 없었다. 더군다나 모든 게 부족한 조선 수군의 상황을 생각하면, 그런 철쇄를 만들 철이 있으면 화포나 여타의 무기를 만드는 게 더 효율적이다.

 철쇄 가설의 근거가 되는 기록은 이중환의 <택리지>나 전라우수사 김억추가 용력으로 철쇄를 가설했다는 <호남절의록>, 김억추의 후손들이 20세기 초에 기록한 <현무공실기> 등이 있다.

 하지만 <택리지>는 기본적으로 역사서가 아닌 지리지로서 철쇄 얘기도 지방의 설화를 기록한 것에 불과하며 실질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지는 못 하다.

 뛰어난 용력으로 김억추가 철쇄를 가설했다는 <호남절의록>의 기록도 당연히 현실성 제로.

 <현무공실기>는 여타의 행장류가 그러하듯이 조상을 터무니없이 칭송하는 기록에 불과하다. 그나마 당대도 아닌 후대의 기록이다. 게다가 <현무공실기>에는 김억추가 칼을 한 번 휘둘러서 적선 수백척을 격침시켰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그러니까 현무공의 정체가 실은 얘였다거나? 철쇄가 실은 철쇄아의 와전이라면 그럴 듯 하다.(어디가!)

 그리고 그 정도 철쇄는 만들려면 많은 양의 철이 필요하다. 그러나 명량대첩 당시의 조선 수군은 모든 게 부족한 상황. 그럴 철이 있으면 무기라도 더 만드는 게 낫다.

 좌수영에서 발견된 수중장애물의 흔적을 근거로 철쇄설을 주장하기도 하지만,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울돌목은 물살도 거세고 당시 조선 수군은 자원도 없고, 시간도 없었다. 그 사이 그 지형에 철쇄를 설치할 여유는 아무리 이순신이라도 없다.

 그럼 강강수월래는?

  강강수월래의 유래는 무엇인지 정확하지가 않다 그런데 여기에는 이순신과 관련된 속설이 전한다. 그러나 그야말로 속설에 불과한 것이 유력한 학설인양 둔갑을 하고 있는데 그 실체를 알아보자.

 이순신과 관련된 걸로 몇년전 방영한 모방송사의 드라마의 내용과 일치하는 것이 있다. 명량대첩 시 병력이 부족하자 이순신은 아낙네들을 동원하여 강강수월래를 추게 하여 아군 병력이 많은 것처럼 위장하였다는 속설이 전한다. 이것은 조금씩 내용을 달리하여 산봉우리에서 강강수월래를 했다는 것, 갯마을에서 했다는 것 등이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속설일 뿐이다. 우선 <난중일기>어디에도 강강수월래에 관한 기록이 없다.

 게다가 명량대첩 처럼 아군은 부족하고 적군은 수없이 많은 전투에서 여자들을 병사로 위장시키는 작전은 매우 위험하다. 단병접전에 강한, 게다가 공성전이나 수성전에서는 패한 일도 많지만 야전에서는 대부분 이긴 일본군이 육지의 병사들을 본다면, 병력도 충분하니 후방 함대의 병력을 상륙시켜 도륙할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되면 변변한 훈련도 못 받은 여자들의 운명은 비참한 꼴을 맞이할 것이다.

 그리고 일본군 눈이 다 시력 마이너스만 모여있었겠는가? 처음엔 단순히 빙빙 도는 것을 보면 처음에는 속는다고 치자. 하지만 자세히 관찰하면 단순히 손 잡고 도는 것이라는 걸 깨달을 수 있다. 거기에 그렇게 병력이 많으면 포구에 방치된 판옥선을 더 끌고 나오던가, 육지에서라도 화살과 포를 쏘며 공격하던가, 아니면 매복이라도 할 일이지 단순히 움직이기만 하면 일본 장수들이 아무런 의심을 안 할 리가 있을까? 내 머리 속에서도 나오는 생각인데, 이순신이 이런 걸 생각 못할 리가 없으니 여자들을 무리하게 끌어들이는 작전을 구사하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실제 작전이었다면 <난중일기>나 <징비록>, 이순신의 조카 이분의 <행록>에 기록되던가, 당시 수군 장수들의 가문에서 쓴 <행장>에라도 ‘우리 조상이 강강수월래 제안 했습니다.’라는 조작이라도 있어야 할 텐데 그런 기록은 전혀 없다.

 그럼 강강수월래의 유래는 무엇인가? 서두에 언급한 바와 같이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추석의 유래는 신라로 거슬러 올라가고, 고구려나 부여, 백제 등 다른 고대국가들 역시 제천 행사들을 가졌는데, 이런 행사들은 여러 사람들이 어울리는 축제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어울리는데 모두 손잡고 빙빙 돌며 춤을 춘다는 발상은 고대인들의 시각에서도 어렵지 않게 생각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도 마한에 대하여 ‘5 월에 씨를 다 뿌리고 귀신을 제(祭)한다. 때를 지어 모여 노래하고 춤추며 술을 마신다. 밤낮 쉬지 않고 수십 명이 함께 춤을 추는데, 다 같이 함께 일어나 서로 따르며 가락에 맞추며 손발을 맞추어 몸을 높였다. 낮췄다 하면서 땅을 밟는다. 이와 같이 탁무(鐸舞)와 비슷한 춤을 10월 농사를 끝낸 후에 또 다시 춘다.’라는 기록이 있는 걸 보면 강강수월래의 원형은 고대로 거슬러 올라감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마한이면 지금의 전라도 일대와 일치한다.

 결국 강강수월래는 전라도에서 오래 전부터 전해지다가 이 곳이 이순신의 주 활동무대와 겹치면서 이순신과 관련된 속설이 퍼진 게 된 것이라 생각한다. 백성들 사이에야 이런 속설이 퍼질 수도 있다. 하지만 강강수월래에 관한 속설 소개라면 몰라도 진짜 유래인양 설명한다면 그건 문제이다. 아무리 드라마라도 공영방송국의 정통사극에 이런 속설이 그대로 반영되는 건 사람들의 잘못된 인식을 확고히 해줄 수 있으니 역시 문제이다.

 결국 명량대첩은 단 13척의 판옥선으로 5,6백 척의 적을, 후방에 있는 수송선들을 제외하고라도 300척 이상의 적을 상대해야하는 전투였다. 더불어 철쇄 같은 건 없고, 강강수월래를 출 일도 없다. 칠천량해전의 여파로 사기는 바닥이다. 조정은 아무것도 지원해주지 않았다. 부하장수들도 모두 겁을 먹은 지라 통제사 이순신이 믿을 건 자기 자신 밖에 없었다. 그야말로 최악의 조건에서 싸워야 했던 것이다.만일 이것이 역사가 아니라 어느 소설의 줄거리였다면, 그 소설을 리얼리티가 형편없다는 비판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소설이 아닌 역사였다. 누가 봐도 절대 이기지 못할 것 같은 싸움, 그 앞에 이순신은 고독하게 맞서고 있었다. 하긴 그런 싸움에 압도적으로 이겼으니, 이런 속설이 사실처럼 받아들여지는 것도 납득이 간다.

by 을파소 | 2009/11/05 22:47 | 이순신/임진왜란 | 트랙백 | 덧글(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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