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균옹호론자들이 즐겨 말하는 주장이 있다. 원균은 본래 《선조실록》에는 뛰어난 맹장으로 기록이 되어 있는데, 인조반정 이후 이순신과 같은 가문인 택당 이식에 의하여 《선조
수정실록》이 편찬되면서 비겁자라는 이미지로 왜곡되면서 오늘날의 원균의 모습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원균은 정말 《선조수정실록》에 의하여 왜곡되었는가? 물론 아니다. 지금가지 살펴본 원균옹호론자들의 주장이 항상 그랬던 것처럼.
먼저 실록이 수정된 경우에 대하여 살펴보자. 조선후기에 실록이 수정된 사례가 몇 번 있는데, 비록 실록이 고치더라도 수정 이전의 실록도 함께 남겨두어 서로 비교가 가능하게 하였다. 이런 원칙으로 고쳐진 실록은 《선조수정실록》, 《현종개수실록》, 《숙종실록 보궐정오》, 《경종수정실록》이 있다.
그런데 실록이 고쳐진 경우가 ‘수정’, ‘개수’, ‘보궐정오’라는 식으로 조금씩 다른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는 실록이 고쳐진 범위와 정도에 따라 달라진다. ‘수정’은 수정자의 관점에서 사실의 착오를 바로잡거나 누락된 내용을 덧붙이는 정도라서 고쳐진 부분이 많지 않았다. 그러나 ‘개수’는 처음의 실록은 완전히 부정하고 완전히 새로 편찬하는 경우였다. 따라서 원래의 실록과 동일기사도 다시 쓰고, 사신론도 새로 쓰는 일이 많았다. ‘보궐정오’란 잘못된 문자나 기사를 발견하여 빠진 건 보충하고 잘못된 건 다시 쓴다는 의미로, 개정된 부분은 따로 편찬하지 않고 본래 실록의 권말에 부기하여 합본한 일종의 부록이었다.
즉,책을 썼는데 나중에 그 책의 틀린부분만 좀 고친다면 ‘수정’, 처음부터 다시 쓰면 ‘개수’, 잘못된 부분을 고치는 걸 부록으로 덧붙이면 ‘보궐정오’이다. 이러하니 《현종개수실록》은 분량이 23권 23책인 《현종실록》보다 더 많아져서 29권 29책으로 늘어났다. 하지만 수정실록은 일부 내용만 고치는 정도이다 보니 그 분량은 본래 실록보다 더 적어서 《선조실록》은 221권 116책이지만 《선조수정실록》은 42권 8책, 《경종실록》은 15권 15책이지만 《경종수정실록》은 5권 5책이다.
자, 여기서부터 원균옹호론자들의 주장의 허점이 나온다. 《선조수정실록》은 그 성격이 《선조실록》의 보충자료 수준일 수밖에 없다. 당연히 사학자들은 연구를 하자면 《선조수정실록》보다는 《선조실록》 쪽을 더 많이 볼 수밖에 없다. 비록 《선조실록》에 기록된 사실도 연구가 부족한 겨웅도 있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멀쩡한 《선조실록》을 놔두고 《선조수정실록》만 보고 원균에 대하여 오해할 정도로 이 나라 사학자들은 바보들이 아니다. 임진왜란을 연구하는 자라면 당연히 《선조실록》을 읽는다. 그런 걸 실록을 접할 일이 적은 일반인들을 상대로 《선조수정실록》 때문에 원균이 왜곡되었다느니 망발을 일삼는 것이다.
그래도 사학자들을 의심할 사람이 있을까봐 좀 더 원균옹호론자들의 허위성을 살펴보겠다.
조선후기에 실록이 개정된 경우는 대개 당쟁의 산물이었다. 원래의 실록을 편찬할 때의 집권당을 몰아내고 다른 당파가 집권을 하면서 새로운 집권당이 본래 실록에 불만을 가지고 실록 개정을 주도한 것이다.
《선조수정실록》 역시 예외는 아니다. 《선조실록》은 광해군 1년인 1609년부터 편찬하기 시작하여 그 이듬해에 완성되었다. 처음에는 서인인 이항복이 총재관이 되었으나, 그 뒤 북인인 이이첨과 기자헌을 중심으로 편찬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1623년에 서인이 주도하고 남인이 동조한 인조반정으로 대북파 정권이 붕괴하고 남인 원로 이원익이 영의정이 되는 외형상으로는 서남인 연립정권, 실질적으로는 서인정권이 수립되었다. 서인입장에서는 서인 이이, 성혼, 정철 등에 대하여 비방기록이 있는
좌편향 대북편향적인 내용이 실린 《선조실록》이 마땅치 않았다. 또한 북인 이산해, 이이첨 에 대한 기록도 불만스러웠다.
이러한 배경으로 인조 즉위 초기 경연관 이수광과 임숙영 등에 의하여 《선조실록》의 수정이 건의되었다. 좌의정 윤방 또한 《선조실록》의 수정을 건의하지만 이괄의 난과 정묘, 병자호란 등이 내우외환이 이어지면서 《광해군일기》의 편찬까지도 큰 차질을 빚을 사정이었기에 시행되지 못 하였다.
그러다가 다시 《선조실록》의 수정이 다시 건의된 것은 1641년으로 대제학 이식의 건의에 의해서였다. 결국 이식을 책임자로 하여 《선조수정실록》의 편찬이 추진된다. 하지만 1646년 이식이 다른 일로 파직당하면서 실록 수정도 중단되었다가, 10여년 후인 1657년 좌의정 심지원의 건의로 영돈녕부사 김육과 윤순지, 이일상 등의 주관으로 수정을 재개, 그 해 9월에 완성된다. 그래서 《선조수정실록》은 1567년(선조 즉위년)부터 1596년(선조 29년)까지는 이식에 의해, 1597년(선조 30년)부터 1608년(선조 41년)까지는 김육 등이 편찬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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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균옹호론자들의 주장을 보자면 이식이 원균을 왜곡하려고 실록을 수정한 것 같지만, 《선조수정실록》은 엄연히 서인의 당파적 이익에 의하여 편찬된 것이다. 이식이 수정 작업을 주도하였다고는 하나 그의 개인적 입장에 따른 게 아니다.
더군다나 이식이 특별히 원균을 깎아내리고 이순신을 칭송할 이유는 없다. 이식과 이순신은 같은 덕수이씨로 이순신은 시조 이돈수의 12세손, 이식은 15세손이라고는 하나, 그들의 조상은 4세손일 때부터 갈렸기에
현대의 개정 민법 기준으로는 두 집안의 남녀가
결혼을 하더라도 법적 문제가 없을 먼 친척 관계였다. 만일 임진왜란이란 전쟁이 없이 평화기만 이어졌다면 이식은 기껏해야 이순신의 이름 석자나 겨우 들어봤을 것이다. 그야말로 본관만 같지 꽤나 먼 친척을 위하여 《행장》을 써주는 것도 아니고 국가 공식기록인 실록에 손을 볼 정도로 절친한 사이는 아니다. 더군다나 아무리 이식이 주도하더라도 결국은 국가 공식기록인 것을.
그리고 무엇보다도 과연 《선조실록》이 과연 원균에게 호의적이긴 한 것인가? 이 연재를 한 번 돌아보면 필자가 《선조수정실록》보다는《선조실록》을 인용하여 왔다. 그것만으로도 원균의 죄악과 실체를 보여주기에는 충분했다. 정말 《선조실록》이 원균에게 호의적이라면 이런 일이 가능하겠는가?
물론 《선조실록》에 원균에게 호의적인 말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그 말은 거의 대부분 원균을 띄워서 이순신을 견제하려거나 칠천량 해전 이후 원균을 통제사로 임명한 책임을 회피하려는 선조의 말, 혹은 임금의 비위를 맞추려고 하거나 이순신을 침으로 남인을 공격하려는 대신들의 말, 아니면 떠도는 소문이나 원균의 말만 듣고 발언하는 경우였다. 원균이 “그 사람 용감해요.”라는 식의 말은 있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용감히 싸웠는가 하는 말은 없다. 임진왜란 초기 원균이 단독으로 적선 10척 혹은 30척을 분멸했다는 것도 원균 옹호론자들의 주장은 오직 원균 자신의 말, 혹은 이순신 등 다른 사람들이 “원균 말로는 그러더군요.”라는 말을 이용한 수준이었다. 심지어 원균을 선무1등곤싱으로 올린 선조조차도 원균이 구원을 청한 공이 잇다고 했지, 처음으로 적선을 분멸한 공이 있다는 말은 끝내 안 한 걸 보면 원균옹호론의 시조에게 조차 인정받지 못한 정체불명의 공로다.
하지만 대신 원균이 인사고과 문제로 탄핵당하거나 뇌물을 받아 탐학하다는 얘기, 충청병사 시절 산성을 부실 공사한 얘기, 역시 충청병사 시설 병마사는 종사관을 둘 수 없는 법도를 어기고 종사관을 두었는데 그 종사관이라는 작자는 임진년에 피난민 목을 베어 적군으로 위장하여 공을 세우려다가 실패한 인물이란 이야기, 칠천량 해전을 전후하여 처음에는 큰소리치다가 나중에 ‘패배’라기도 민망한 수군 ‘해산’ 이후 잠적하는 이야기 등은 《선조실록》에 충분히 나온다.
《선조실록》의 사관론 중에 간단하게나마 원균을 이순신과 함께 힘써 싸운 인물로 평가해놓은 경우도 있긴 하다. 그러나 그런 사관의 사관론은 전쟁의 승리는 명나라 덕분이라는, 선조의 논리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그리고 원균을 비판하는 사관론은 그 보다 훨씬 많다.
그럼 《선조수정실록》 에 나온 이순신은? 연전연승 한 기록이나, 그가 전사하면서 백성들이 슬퍼한
풍경이 나오기는 하지만, 그에게 유리한 기록만 나오는 건 아니다.
처음에 원균(元均)이 이순신에게 구원병을 청하여 적을 물리치고 연명(聯名)으로 장계를 올리려 하였다. 이에 순신이 말하기를 ‘천천히 합시다.’ 하고는 밤에 스스로 연유를 갖춰 장계를 올리면서 원균이 군사를 잃어 의지할 데가 없었던 것과 적을 공격함에 있어 공로가 없다는 상황을 모두 진술하였으므로, 원균이 듣고 대단히 유감스럽게 여겼다. 이로부터 각각 장계를 올려 공을 아뢰었는데 두 사람의 틈이 생긴 것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문제의 임진년 연명장계 문제. 실상은 각자 따로 올려도 되는 걸 원균이 자기 공이 없으니 억지로 연명으로 얼리자다가 거절당한 것. 임진년에는 아무 문제 없다가 정유년 이순신이 파직당하기 직전에야 이산해의 입에서 이 얘기가 나온다. 하지만 단독으로 올리 경우데도 주변의 관리들도 그 내용을 알 수 잇기에 몰래 올렸다는 건
떡밥에 불과하다. 그러나 《선조수정실록》에는 이렇게 원균옹호론자들이 주장하는 바가 그대로 실렸다. 그래서 《선조수정실록》이 왜곡투성이라고도 잘 말하다가 이 부분은 잘도 인용한다.
이조 좌랑 김신국(金藎國)이 서계하였다.
“지난번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이, 부산 군영을 몰래 불태운 사실을 조정에 보고하였는데, 이원익(李元翼)이 신에게 말하기를 ‘군관 정희현(鄭希玄)이 일찍이 조방장(助防將)으로 적의 둔영(屯營) 근처에 오래 머물면서 부산 수군 허수석(許守石)을 심복으로 삼았었다. 수석이 적진을 드나들었는데, 그의 동생이 부산 군영에 있었기 때문에 적의 정세를 잘 알았다. 마침내 수석과 계책을 세워 날짜를 약속하여 몰래 적의 둔영을 불태웠는데, 그날 순신의 군관이 마침 부산에 이르렀다가 먼저 순신에게 보고하여 자기의 공로로 삼은 것이다. 그런데 순신은 그런 내용을 전혀 모르고 그렇게 계문한 것이다. 이제 수석과 다시 도모하는 바가 있는데, 만약 수석에게 벼슬을 상으로 내리면 일이 혹 누설될까 싶고, 공로를 순신의 군관에게로 돌리면 수석이 반드시 분하게 여겨 현재 도모하는 일이 제대로 되지 않을까 싶다.’고 하였습니다.”
부산왜영방화사건 역시 이순신이 먼저 장계를 올린 후 김신국이 그게 아니라며 장계를 올렸는데 그러면서 이원익이 더 자세히 안다고 하고, 이원익은 김신국이 더 잘안다고 서로 미룬 일이다. 그러나 정작 허위보고의 장본인이어야 할 안위는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고, 선조도 이순신이 안위의 공을 빼앗은 양 알해 사실상 부산왜영방화의 주도자가 안위 임은 인정한 바 있지만, 《선조수정실록》에서는 이순신의 허위보고로 기록되었다. 이순신이라고 특별히 더 유리하게 나온 것만은 아니다.
그리고 사실《선조수정실록》이 나온 인조에서 효종 때에 있어서, 아니 임란 직후부터 원균에 대한 평가는 더 이상 좋을 게 없어서 이식이 굳이 일부러 왜곡할 필요도 없었다. 《선조수정실록》도 이식의 창작이 아니라 여러 개인 문집 등을 참고한 것이니, 거기에 나온 원균 평이 나쁘다면 그건 신빙성 있는 자료들에 나온 원균의 모습이 그랬다는 뜻도 된다. 부디 《선조수정실록》이 왜곡했네 같은 소리를 하고 싶다면 먼저 《선조실록》부터 살펴 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