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방명록 방명록

2016년도 방명록입니다.

매년 그랬듯 포스팅과 무관한 덧글을 달아주시면 됩니다.

악플은 지우고 싶으면 지우고 귀찮으면 그냥 다른 분들 구경이나 하시라고 남겨 둘 겁니다.

터키 쿠데타에 대한 일부 반응 보니 을파소의 세상보기

뭔 독재자 에르도안을 축출하려는 정의의 쿠데타가 일어났는데 어리석은 터키 국민들이 방해한 것으로 아는 반응이 보이는군요.



이런 식으로 말이죠.

그런데 뭐가 어찌 되었던 간에 에르도안은 선거로 선출된 대통령이며, 쿠데타군은 그걸 부정하려 했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국민에게 총질까지 하였죠. 그런데도 이런 쿠데타를 옹호할 구석이 있단 말입니까? 국민에게도 총을 쏘는 세력이 집권하면 얼마나 민주적이겠습니까?


어느 카페에선 누가 이렇게 쿠데타군의 발포도 정당방위인 마냥 얘기하더군요.


 
그리고 같은 사람이 쿠데타군이 린치 당하거나 채찍질 당한 것엔 이렇게 반응하고 말이죠.

물론 법치국가라면 쿠데타를 일으켰어도 사적 제재가 아니라 법에 따라 처벌하는 것이 옳죠. 그러나 쿠데타군의 발포는 쉴드치는 사람이 시민의 행동에는 엄격하다는 것은 분명 모순입니다. 오히려 일반 시민보다는 무장한 공권력인 군에 더 많은 책임이 요구되고, 게다가 그 공권력이 정당한 명령으로 움직인 것도 아니고 쿠데타를 일으킨 것 자체가 이미 법과 원칙을 벗어난 것인데, 그것도 모자라 국민에게 총을 쏜 것은 어떠한 변명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게다가 엄연히 쿠데타가 먼저 일어났지 시민들이 멀쩡한 군인을 습격한 게 아닙니다. 

그런데 시민이 쿠데타 일으킨 군인을 죽이는 건 배은망덕이지만 군인이 총을 쏜 건 정당방위라니 이게 뭔 논리입니까. 

이런 게 아니라도 독재를 끝낼 쿠데타를 멍청한 터키 국민이 막았다는 말이 많이 보이는데, 에르도안에게 문제가 있어도 쿠데타로 끝낼 수는 없습니다. 군사정권이 얼마나 민주적이겠습니까? 차라리 ㅇㅂ 쪽에서 나오는 소리면 이해하겠습니다. 동의는 안 하나 그래도 그들의 논리에는 일관적이거든요. 그래나 진보를 자처하는 자들이 쿠데타를 지지하고 터키 국민을 어리석다하는 건 심각한 자가당착입니다. 

터키 국민은 막을 걸 막은 겁니다. 그걸 어리석다 무시하는 자들은 지들이 똑똑한 줄 알지만, 그들이야 말로 어리석고 위험합니다. 한국에서 비슷한 논리로 쿠데타 일어나도 환영할지도 모르는 자들이니까요. 저들이 1930년대 독일에 살았으면 나치에 열광햇을 거란 생각이 드는 건 착각일까요?

민주주의가 채찍질로 이루어지는 않지만 총질로 이루어 지지도 않습니다.


<어쩌다 어른> 설민석 강의에서 김성일 문제 이순신/임진왜란

설민석의 방송 강연 대략 잡상

위 포스팅에서 한 번 얘기한 것이지만 또 하는 건 어쩌다 어른이란 프로그램에서 이 말을 한 게 처음이아니란 사실을 알아서다.

위 포스팅은 6월에 방송된 내용을 보고 한 것인데, 이미 1월에 같은 프로그램에서 한 강의에서도 김성일에 대해 동일한 내용의 얘기를 한 것을 알았다.

1월 방송의 주제는 '초심'이었는데 조선은 민본이라는 초심으로 건국된 나라지만 위정자들이 이 초심을 잃어 나라에 위기가 왔다고 얘기한 것. 문제는 김성일이 황윤길의 의견에 당파가 다르다는 이유로 전쟁은 나지 않는다고 반대를 위한 반대를 했고, 이후 동인들이 묻자 전쟁이 나는데 서인이 난다고 하니 반대해야지 라고 말했다고 기록에 나왔다고 말햇다는 것. 그래서 '민본'이란 조선왕조의 초심을 잃은 위정자 때문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는 내용의 강의였다.



즉, 김성일을 민본을 잊은 위정자의 대표적인 인물로 지목한 것이다.

김성일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 그런데 방송에서 너무 자신있게 자기가 원하는 주제에 끼워 맞춰 잘못된 이야기를 한다. 김성일이 민본을 잊은 위정자라고? 전혀 그렇지 않다.

우선 설민석이 어쩌다 어른에서 기록에 있다고 한 동인이 물으니 서인이 전쟁난다고 하니 안 난다고 햇다는 부분. 대체 무슨 기록을 봤는지 모르겠다. 일단 동인이 물은 건 기록에 있다. <징비록>에 유성룡이 물어본 것이 있으니. 그러나 김성일의 답은 전혀 다르다.

"저라고 어찌 왜인들이 끝내 움직이지 않으리라 알 수 있겠습니까? 다만 황윤길의 말이 너무 중대해 경향 각지가 놀라고 미혹될 것이기에 이를 풀고자 할 따름입니다."

반대를 위한 반대가 아니라 민심이 혼란해질까봐 반대한 것이다. 전쟁대비는 좋지만, 자칫 호들갑떨면 민심이 혼란해져 되려 악영향이 나기 좋은 법이니 이를 염려한 것이 본의라고 '기록'에 나왔는데, 서인이 전쟁난다고 하니 안 난다고 말했다고 기록에 나왔다 하다니...


사실 김성일의 반대의견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나름대로 전쟁 대비는 하여 성곽을 보수하고 능력있는 무관을 승킨시키고 했다. 여기에 김성일은 또 반대를 하긴 했다. 그런데 그걸 동인이라 서인에 반대해서가 이유일까?

당시에 왜란을 대비해서 성지(城池)를 수축하고 병정(兵丁)을 선발하자 영남의 사민(士民)들은 원망이 더욱 심하였다. 성일은 본래 왜변을 염려하지 않았으므로 더욱 잘못된 계책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비변사에서 장수를 선발하는데 이순신을 우선 발탁하니 성일은 또 잘못된 정사(政事)라고 하였다. 

당시에 왜란을 대비해서 성지(城池)를 수축하고 병정(兵丁)을 선발하자 영남의 사민(士民)들은 원망이 더욱 심하였다. 성일은 본래 왜변을 염려하지 않았으므로 더욱 잘못된 계책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비변사에서 장수를 선발하는데 이순신을 우선 발탁하니 성일은 또 잘못된 정사(政事)라고 하였다. 
<선조수정실록> 1591년(선조 24년) 11월 1일

김성일의 반대이유는 일단 사민의 원망이다. 이 상소를 올리는 건 그의 문집 <학봉집>에 나와 있다.


부제학 신 김성일(金誠一), 교리 신 심희수(沈喜壽), 부교리 신 이호민(李好閔), 수찬 신 김시헌(金時獻), 부수찬 신 박지(朴篪) 등은 삼가 아룁니다.
삼가 신들이 보건대, 요즈음 날씨가 평상시와 달라 춥고 더움이 절후를 잃은 탓에 동짓달이 다 가도록 물에는 한 조각의 얼음도 없고, 혹 찬 바람만 불어 음산하기만 하며, 흙이 축축하도록 안개가 끼기도 합니다. 그리고 괴이한 기운이 사람들을 덮쳐 여항 사람들이 모두 감기에 들었는바, 백 명 가운데 겨우 한 사람 정도만이 감기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중략)
더구나 지금은 백성의 힘이 피폐하여 나라의 근본이 위태롭습니다. 그런데도 좌우에 있는 신하들 가운데 한 사람도 자신이 직접 국사를 담당하고자 하여 밤에 생각해서 새벽에 들어가 아뢰는 자가 없습니다. 비록 성상께서 지척에 계신 경연에서도 또한 어물어물하면서 쳐다보기만 하여 결말을 내리지 못합니다. 그런 데다가 들어가 뵙는 때가 드물어서 성상과 신하들 사이가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러니 그 누가 다시 한유(韓愈)나 육지(陸贄)와 같은 충성을 가진 자가 있어서 상소를 올리거나 상주(上奏)를 하는 사이에 부지런하고 간절하게 하겠습니까.
이 때문에 아랫사람들의 심정은 날로 막히고 뭇 간사함이 한꺼번에 일어나는 탓에 백성들이 들판에서 원망하는데도 위에서는 알지 못하고, 간사한 거짓이 안에서 일어나는데도 주상께서는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에 어두워지고 어지러워져서 마침내 정치가 없는 나라가 되고 말았으니, 신들은 몹시 슬픕니다.
무엇을 일러 백성들이 들판에서 원망한다고 하겠습니까. 지금 이 축성(築城)하는 폐단에 대해서는 신들이 앞서 이미 아뢰었으며, 비변사에서도 또 축성하는 것을 정지하는 것이 옳다고 결정하였습니다. 그런데 영(令)을 내린 것이 너무 늦었으므로 불러모은 자가 다 모였고 삼태기와 가래가 이미 갖춰졌습니다. 이에 수령들은 말하기를, “지금 만약 공사를 정지하고서 되돌려 보낸다면, 이는 그동안에 이룩해 놓은 공을 흩어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내년 봄의 부역은 수고로울 뿐만 아니라 또한 중복되어서 순변사(巡邊使)가 오기 전에 끝마치지 못할 것이다.” 하였고, 공사를 하는 자들도 말하기를, “지금은 비록 수고롭기는 하지만 가을 곡식이 아직 남아 있다. 만약 봄이 지나고 나면 식량을 비축할 방책이 없고 또 보리도 갈지 못할 것이어서 내년의 양식이 끊어질 것이다. 그러니 고생을 참으면서 그대로 공사를 하는 것이 낫다.” 하였습니다.
이에 힘을 쓰느라 영차영차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으면서 공사가 한창이어서 주먹만한 돌을 쌓고 얼기 시작한 흙을 뭉쳐 쌓아 놓았습니다. 그런데 새알을 포개 놓듯 위태롭게 쌓아 올린 것이 열두 자나 되도록 높으니, 눈이 내려 얼었다가 햇볕을 받아 녹게 되면 내년 봄을 기다릴 것도 없이 거의 다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중국의 장성(長城)을 쌓을 때는 천하의 힘을 다 동원했어도 오히려 빠른 시일 안에 준공하지 못하였습니다. 이 성을 쌓는 것은 그 높이나 길이가 비록 장성에 비길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완급(緩急)도 묻지 않고 한꺼번에 일제히 공사를 일으켰으므로 생민들의 도탄에 빠진 듯한 괴로움이 끝이 없습니다. 하물며 조그마한 나라의 힘으로 몇 달 안에 공사를 마치려고 하니, 비록 튼튼히 쌓아서 무너지지 않도록 하려고 한들 되겠습니까.
신들이 내지(內地)에다가 성을 쌓는 것이 이로움은 없고 해만 있다는 것을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무릇 성지(城池)와 갑병(甲兵)은 국가를 방위하고 도둑을 막기 위한 것입니다. 신들이 비록 형편없기 그지없으나, 또한 한 백성으로서 그 방위 안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참으로 털끝만큼이라도 국가에 유익한 점이 있다면 외적의 침입에 미리 대비하여 국가에서 요새지를 설치하는 일에 대해 어찌 감히 입을 놀려서 불편하다고 말하겠습니까.
우리나라가 있으면서부터 이 군현도 있었는데, 관방(關防)을 설치하거나 성곽을 쌓을 때에는 모두가 그 형세를 살펴서 가장 긴요한 곳에다가 하였는바, 옛사람이 경영한 계책이 완벽하여 다시 더 헤아려 볼 필요도 없습니다. 전쟁이 많고 공수(攻守)가 어려웠음은 삼국 시대 때가 지금보다 열 배는 심했습니다. 그런데 내지의 군현에는 일찍이 성지가 없었는데도 오늘날까지 보전하여 왔습니다. 안열(安悅)이 도둑을 물리친 것은 수주(水州)에서였으며,김선궁(金宣弓)이 적을 이긴 것은 안성(安城)에서였는데, 여기에 무슨 웅거할 만한 산천이나 성곽이 있었습니까.
지금 관방(關防)과 망루(望樓)를 골고루 내성(內城)에까지 설치하고 있는데, 인심을 동요시키는 것이 불편한 점이고, 힘이 약해서 완공하기 어려운 것이 불편한 점이며, 백성들을 고달프게 하고 재력을 다 허비하는 것이 불편한 점이고, 튼튼하게 쌓지 못하여 해마다 수리하느라 백성들을 해치는 것이 불편한 점입니다. 한 고을의 성은 그 크기가 반드시 한 고을이나 한 면의 백성들을 다 수용하지 못합니다. 이에 그 나머지 사람들은 대개 마을에 숨어 있거나 노약자들은 들판에 흩어지게 됩니다. 그런데도 ‘내가 성을 잘 지켰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신들이 듣건대, 이 역사를 시작할 때 전지 1결당 베 17, 8필까지 냈으며, 하루 역사에 보상하는 쌀이 4, 5곡에 이른다고 합니다. 그리고 활, 화살, 갑주 같은 기구에 이르러서도 그 길고 짧은 제도가 사람마다 의견이 다른 탓에 매번 점검을 거칠 때마다 반드시 개조하게 하며, 그 다음에 온 자가 또다시 잘못되었다고 꾸짖는데, 고치는 비용을 모두 민간에 책임지운다고 합니다.
신들이 일찍이 민가에 출입하면서 생산하는 것을 살펴보니, 궁한 백성들이 비록 일 년 동안 고생고생하여도, 가을을 당하여 공사(公私)간에 빚진 것을 갚고 나면, 쌀독은 텅 비어 있으며, 남아 있는 것이라곤 도토리나 나물뿌리, 겨, 콩잎 등속뿐으로, 겨우 굶어 죽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몇 섬의 곡식만 있으면 실호(實戶)라고 일컫는데, 이런 사람조차 또한 매우 드뭅니다.
일 년에 세금으로 바치는 것과 노비들에게 각종 명목으로 거둬들이는 베는 해마다 일정한 양을 내도록 부과하였으므로, 온 힘을 다하여 미리 조치해서 대충 마련해 내고 나면 한 해의 일이 끝나게 됩니다. 그런데 만약 그렇게 하지 못하였을 경우에는 매를 맞으면서 한 해를 마치게 됩니다. 그런 데다가 또 규정된 세금 이외에 덧붙여 거두는 것도 있어서 이와 같이 번거롭게 많이 거두어들이니, 백성들이 목숨을 부지할 수가 있겠습니까. 신들은 듣건대, 불쌍한 과부가 밭을 팔아 세금을 바쳤는데도 부족하여서 숲 속에 들어가 목을 매어 죽은 자도 있다고 합니다. 신들은 거룩하고 밝은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하였습니다.
관동(關東) 지방은 또 땅은 척박하고 백성은 가난하여 성을 쌓는 역사를 더욱더 지탱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도망한 백성들이 영남의 산골 마을로 잇달아 들어가고 있는데,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인바, 신들은 몹시 걱정됩니다. 이것이 이른바 백성들이 들판에서 원망하여도 주상께서는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백성이 원망하여 배반하면 괭이나 고무래를 들고 일어나더라도 강한 진(秦) 나라의 왕업을 망하게 할 수 있는 법이고, 사람들이 화합하여 뭉치면 탄환만한 고구려로도 넉넉히 대업(大業)의 군사를 무찌르는 법입니다. 지금은 백성들이 이와 같이 흩어졌으니, 비록 성과 해자(垓字)가 있다 한들 누구와 더불어 나라를 지키겠습니까. 신들의 생각으로는, 관방(關防)이 예로부터 있던 곳은 해마다 금성탕지(金城湯池)를 수리하여 굳건하게 하고, 내지(內地)에 대해서는 아직 쌓지 않은 곳은 일체 정지하여 그만두고, 이미 쌓은 곳은 그대로 두면 될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럴 경우에는 그래도 백성이 다 흩어지기 전에 살 곳을 찾을 것입니다.
 (중략)
신들은 이에 대해서 실로 등에 땀이 배어나는 점이 있습니다. 신하로서 임금에게 고할 때에는 반드시 먼저 아래에 있는 자로서의 도리를 바르게 하여야만 합니다. 근년 이래로 사대부들 사이에는 탐오(貪汚)한 짓이 풍습이 되었으며, 관절(關節)이 성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유사가 안핵(按覈)하여 다스렸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이런 처지에서 한갓 이러한 외람스럽고도 미세한 일을 가지고 전하께 낱낱이 아뢰었으니, 이것이 어찌 신하로서 신하의 도리를 다하는 의리이겠습니까. 삼가 전하께서는 저희들의 어리석은 충정을 가엾게 여겨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결정을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 <학봉집> 축성(築城)하는 것을 정지하기를 청하고 이어 시폐(時弊)를 진달하는 차자

대략의 내용을 보면 축성에 반대하는 것은 백성의 고통이 크지만 그만큼 효과는 보기 힘들다는 점을 들고 있는데, 이것이 민본을 잊은 사람의 상소인가?

이거 말고도 김성일이 백성을 생각한 행적은 더 남아 있다.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하늘이 듣는 것은 우리 백성들을 통하여 듣고, 하늘이 보는 것은 우리 백성들을 통하여 본다.” 하였습니다. 무릇 하늘이 백성을 보는 것은 부모가 자식을 보는 것과 같은 법입니다. 자식이 죽을 지경이 되었는데도 부모된 자가 마음 아파하고 근심하지 않는 법은 없습니다. 또한 모든 백성들이 제 살 곳을 잃었는데도 하늘이 진노하지 않는 법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백성들이 생겨난 이래로 시국의 편안하고 어지러움과 나라의 흥하고 망함이 모두 여기에서 결판났습니다.
대개 온 세상의 백성이 편안하면 하늘의 마음이 기뻐하여 화기(和氣)가 충만하게 됩니다. 이에 모든 복과 모든 상서가 오지 않는 것이 없어서 나라가 이로써 흥하는 법입니다. 그리고 백성이 원망하고 한탄하면 하늘의 마음이 진노하여 육기(六氣)가 어그러지게 됩니다. 이에 망국의 징조와 급박한 재앙이 닥치지 않는 것이 없어서 나라가 이로써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형체가 움직이면 그림자가 그에 따르고, 소리가 울리면 메아리가 들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하늘과 사람이 서로 관련되는 것이 어찌 크게 두렵지 않겠습니까.
아아, 오늘날 백성들의 생활이 어떻습니까. 피곤함과 괴로움이 극도에 달하였으며, 원망과 한탄도 극도에 달하였습니다. 우리나라는 구역이 구석지고 좁으며 산과 바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에 토지는 척박하고 물력은 박약하여 백성들이 비록 한 해 동안 부지런히 농사지어도 부모를 섬기고 처자를 먹이기에 부족합니다. 그런 데다가 나라에서는 산업을 진흥하는 방책도 없고, 또 어루만져 기르는 방도도 없으니, 실로 법이 없는 나라라 하겠습니다.
조세(租稅)를 바치는 한 가지 일에 대해서만 말하더라도, 토지에 따라 조세를 내는 것은 선왕(先王) 때부터 내려오는 정사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토질의 좋고 나쁨과 군읍(郡邑)의 작고 큼은 묻지 않고, 똑같이 결정하여 생산되지 않는 것조차 다 바치게 하여, 그 괴로움이 이미 극도에 달하였습니다. 요사이에는 또 규정 이외의 각종 명목으로 수시로 징수함이 끝이 없는데, 가혹하게 세금을 징수하기를 살가죽을 벗기고 뼛골을 후벼내듯이 합니다.
그러면서 백성에게 중한 세금을 부과하는 자를 훌륭한 수령이라 하고, 조세 독촉을 엄하게 하는 자를 유능한 서리라 하며, 형벌을 혹독하게 쓰는 자를 일처리에 능한 자라 하고, 백성들의 것을 빼앗아서 위에 바치는 자를 봉공(奉公)을 잘한다 합니다. 이에 360고을 가운데에 자상하고 온화한 수령은 몇 안 되고, 해치고 긁어들이는 것은 곳곳마다 다 그러합니다. 그러니 백성들이 어찌 곤궁하지 않고 원망하지 않겠습니까.
세금 징수의 번잡함이 이미 이와 같은데, 각사(各司)에서 방납(防納)하고서 몇 배의 대가를 받는 폐단은 나라에 있어서는 큰 좀벌레이고, 백성들에게 있어서는 큰 병이 되는 것입니다. 공안(貢案)에는 정해진 액수가 있으나, 백성이 바치는 것은 정해진 액수 이외에도 이른바 인정가(人情價)니 작지가(作紙價)니 하는 것이 있어서 원래의 액수보다 갑절이나 됩니다. 방납에 이르러서는, 각사의 주인(主人)들이 그 이익을 독점하고 있으므로, 백성들이 스스로 직접 바치고자 하더라도 바칠 방도가 없습니다.
-<학봉집> 재앙을 만나 수성(修省)하기를 청하는 차자 중에서

이렇게 백성을 생각하는 상소를 올린 바 있는 사람인데.

이순신의 발탁에 반대한 점은, 우선 그가 김성일과 같은 동인인 유성룡이 천거한 사람인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당파에 눈이 멀어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는 사람이, 자기 당 사람이 추천한 사람의 발탁을 반대하는가? 결과적으로는 김성일의 주장이 받아들여 졌으면 큰일날 뻔 했지만, 그가 당리당략으로 움직이던 사람은 아니라는 건 보여준다. 김성일의 전쟁 발발 전 행적에서 부족한 건 민본정신이 아니라 유연성 같지 않은가? 개인의 성품이 강직한 것은 훌륭하나, 정책이나 상황 변화에 있어선 유연한 사고로 대처할 수도 있어야지 원칙대로 하다 이순신의 인사를 취소하면...

민본 얘기로 돌아오자면, 김성일은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경상도 초유사로 활동하며 김수와 곽재우 사이를 중재하고, 진주대첩도 김성일이 있어 가능했다 할 정도로 많은 활동을 하는데, 이중에도 백성을 챙기는 일도 한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곡식을 옮겨 호남과 영남을 구제하는 일은 전에 김성일(金誠一)의 장계(狀啓)에 의해 이미 행이(行移)하였습니다. 지금 경상좌도 감사(監司)의 장계를 보니, 우도의 곡식을 옮겨 좌도를 구하고 전라도의 곡식을 옮겨 우도를 구하기를 청했습니다. 경상도는 명년 봄에 반드시 구황해야 할 형세라 차차 곡식을 옮겨 운반해 두는 것이 매우 편리할 것이니, 장계대로 시행하도록 삼도 감사에게 행이해야 합니다. 또 영해(寧海) 등 10고을은 적변이 그리 심하지 않으니 편리한 대로 수합하여 적로(賊路)의 군량을 돕게 하고, 청도(淸道) 등 18고을은 공사(公私)간에 재물이 탕갈되어 군량 및 구황(救荒)이 백계 무책(百計無策)이니 민간에 사사로이 저장된 곡식을 넉넉하게 납부시켜 계문(啓聞)하여 상을 주게 하도록 아울러 행이하소서."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선조실록> 1592년(선조 25년) 11월 6일
 
전시에 굶주린 백성을 구하게 곡식을 옮기는 일로 올린 장계. 이 역시 <학봉집>에 남아있다.

(전략)
본도의 흉년과 굶주림은 옛날에 없던 일로서, 칼날 밑에 살아남은 백성이 얼마 안 됩니다. 그런데 요행히 죽지 않은 자들은 서로 모여서 도둑질을 하면서 사람으로써 양식을 삼고 있습니다. 이들을 비록 계속하여 잡아죽이기는 하지만, 또한 금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데다가 곡식 종자가 한 톨도 없어 적이 비록 물러간다 하더라도 농사를 지을 만한 형편이 못 되는바, 도내 사람들의 목숨은 적병이 오지 않더라도 반드시 남김없이 저절로 다 죽을 것입니다.
호남 백성들의 형편은, 꼴과 곡식을 실어 보내는 데 시달리고는 있으나 창고의 곡식이 아직은 온전합니다. 만약 군량과 곡식 종자를 각각 수만 섬씩 옮겨 오면, 신이 비록 직무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기는 하지만 굶주린 자를 진휼하고 적을 막으며, 겸하여 농사도 폐하지 않게 함으로써, 호남의 보장(保障)을 완전하게 하여 국가를 회복하는 기틀이 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신은 죽음이 있을 뿐, 다시는 할 일이 없습니다.
논하는 자는 말하기를, “호남의 재물과 곡식도 다 떨어졌으므로 곡식을 옮길 수 없다.”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도 생각하지 못한 말인 듯합니다. 신이 고개 하나를 사이에 둔 곳에 있으면서 호남 선비들을 만나지 않는 날이 없는바, 그쪽 창고에 있는 곡식이 다 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자세히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또 남원 부사(南原府使) 윤안성(尹安性)을 만나 보니, 그가 말하기를, “호남과 영남은 입술과 이처럼 서로 의지하면서 도와야 할 처지로, 영남이 망하면 호남이 그 다음에 망할 것이다. 그러니 곡식을 옮기는 일을 속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조정에서 회답이 내려오기를 기다리다가는 양곡이 이미 다 떨어질 것이므로 제때에 미쳐서 하지 못할까 염려된다.” 하였습니다. 호남 수령의 말이 이와 같으니, 공론이 어떻다는 것을 잘 알 수가 있습니다.
앞서 계하(啓下)한 쌀과 콩 각 2000섬은 1만 명 군사의 열흘 양식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무슨 일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조정에서 이미 중국 군사를 먹이기 위하여 수만 섬을 본도에 운반하도록 허락하였습니다. 이에 그 쌀과 콩이 이미 운봉(雲峯)과 남원(南原) 등지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런데 중국 군사가 끝내 고개를 넘어오지 않을 것을 염려하여 쌓아 두고 보내지 않고 있습니다. 그 계책은 빈틈이 없다고 하겠으나, 어느 땅인들 왕의 영토가 아니며 어느 백성인들 왕의 백성이 아니겠습니까. 설령 중국 군사가 넘어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것으로 굶주리는 사람도 살리고 군량도 계속 보급한다면, 양쪽 다 편하지 않겠습니까.
공명 고신(空名告身), 허통(許通), 면천(免賤) 등의 항목에 대한 차첩(差帖)을 보내 줄 것을 여러 차례 계청한 바 있으니, 속히 시행하여 거꾸로 매달린 듯한 위급함을 구제한다면 만분의 일이나마 보전할 길이 있을 듯합니다.
중국 군사가 경내에 있어서 그들을 먹이기에도 겨를이 없는 때를 당하여 이런 번거로운 청을 하였으니, 신이 너무도 완급을 모른다고 하겠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본도의 존망이 국가에 관계됨이 매우 크므로, 이와 같이 죽기를 무릅쓰고 다 말씀 올립니다.
-<학봉집> 공(功)을 갚고, 곡식을 옮기고, 곡식을 모집하기를 청하는 서장 

이렇게 전쟁 전에 백성을 염려하고, 전시에도 백성이 굶주리지 않게 조치를 요구하는 상소를 올리는 사람이 어떻게 민본을 잊은 사람인가? 

황윤길의 의견에 반대한 것을 비판할 수야 있지만, 민본을 잊었단 소리는 김성일에게 너무나 억울한 부당한 비판이다. 게다가 황윤길의 의견에 반대하였지만 전쟁 발발 후 나라와 백성을 위해 일하다가 병사하였단 점에서 브렉시트 후 말이 바뀐 탈퇴파 영국 정치인들, 한국에도 흔한 말 바꾸는 정치인에 비한다면 자신의 판단착오에 대해 책임을 지고 헌신했단 점에서 오히려 귀감으로 삼을 만 하다. 이런 사람을 초심을 주제로 강연한다며 민본을 잊은 정치인의 대표로 방송에서 말하다니, 역사를 읽어주는 남자라는 타이틀에 전혀 맞지 않는다.

설민석의 방송 강연 대략 잡상 을파소의 역사이야기

얼마전 tvN의 <어쩌다 어른>에서 최진기의 동양화 특강에 심각한 오류가 지적되고, 결국 당사자가 방송출연 중단을 한 바 있다. 그 다음 차례가 설민석이 수신제가치국평천하란 주제로 시리즈 강연을 하였는데, 최진기만큼 크게 사고치진 않았지만, 한국사를 들려주는 남자, 한국사 열풍을 일으킨 사람으로 띄워지는 사람의 수준이라 보기엔 한참 부족한 내용이 적지 않았다.

몇가지만 예를 들어 보자. 초심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이순신이 초심을 간직한 대표적인 인물이라며 임진왜란이 끝나갈 무렵 모두가 전쟁이 끝났으니 대충 넘어가려 할 때 이순신만이 철수하는 적을 막아 노량해전을 하였다가 강의했다. 그러나 실패로 끝나서 그렇지 조명연합군은 사로병진으로 일본군에 대해 마지막 대대적인 공격을 시도하였으며, 실패 후 전반적으로 전의를 잃고 유일하고 제대로 싸운 수로군을 주도한 이순신이 적극 싸우려 한 건 사실이나 노량해전은 그냥 철수하는 적을 막은 게 아니라 순천천왜교성에 고립된 고니시를 구하러 온 적과 싸운 것이니, 정확한 강의는 아니다. 

그리고 붕당 자체가 나쁜 건 아니었지만 과거에도 당리당략에 물든 정치인이 있었다며 사례로 든 게 김성일, 일본이 쳐들어올 지 여부를 서인이 쳐들어 온다니 반대했다고 말했다. 여기까진 그나마 흔히 알려진 이유라지만, 설민석이 여기서 덧붙이길 나중에 다른 동인들이 정말 전쟁 안 나냐고 묻자 "서인이 전쟁난다고 하는데 반대로 말해야지."라고 해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한 인간으로 낙인 찍었다는 것.

같은 동인이 나중에 물었다는 비슷한 내용은 <징비록>에 나오는데 여기서 김성일은 "민심이 어지러워지는 걸 경계해서"라 대답하였다. 설민석이 말한 것과는 다르다. 그리고 이 때의 발언은 비판핟라도, 개전 후 김성일의 행적은 분명 나라를 위해 헌신한 거였다.

뭐 이상의 내용들은 보통 사람이 말한 거라면 별로 문제될 건 아니다. 위인전에서 흔히 보던 내용이니까. 그런데 설민석은 한국사 전문가로 방송 타는 사람. 그것도 이순신 책을 쓴 이력도 있다. 그런 사람이 노량해전이나 김성일에 대해 저리 말한 건 한참 부족한 거다. 

그 박에 진시황이 불로초 보낸 서복이 제주도에 왔단 전설이나 장희빈이 경종 고자 만들었단 야사 말하면서 전설이나 야사라는 전제를 하지 않아 그냥 사실로 인식할 수 있게 말하는 자잘한 오류가 꽤 있었다. 최진기처럼 크게 이슈화시켜 비판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냥 일반적인 오해를 그대로 담는 내용이 많아 추천하고 싶진 않은 강의였다. 수능강사로서는 훌륭했을지 모르지만, 대중의 역사교양을 높여줄 강사는 아니다.

최진기처럼 큰 사고가 아닐 뿐이지 한국사를 알려주는 남자라고 자처하기엔 부족한 게 많은데, 여전히 그는 한국사 전문가로 방송을 탈 것이다. 설현 지민이 안중근 의사를 몰라본 것 보다 이 쪽이 주는 문제가 더 큰데도 불구하고. 

그러니 인문학이나 역사를 알고 싶다면 그런 방송보고 알았다고 만족하지 말고 '제대로 된' 책을 찾아 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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